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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데어 Aug 16. 2022

온 세상이 주는 위로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공지영) 중에서)


'며칠 전 내린 큰 비로, 준비했던 일들에 차질이 생겼다.'


첫 문장을 시작하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차질'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 내가 겪은 피해와 상심은 너무나 무거웠다. '차질(蹉躓) -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것, 계획이나 의도에서 어그러진 상태'로 나의 상황을 표현할 수 있다면, 마치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계획대로 일이 이루어지도록 바로 잡아가면 될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다시 힘을 내 일어서려다 주저앉고, 일을 바로 잡으려다 다시 좌절하고 있는 상태다. 말하자면 '차질'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 


며칠간 정신을 못 차리다, 오늘에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폭우로 놓쳤던 일상들을 다시 돌아보고 있었다. 여전히 좌절과 슬픔 속에서.... 


키우던 화분 속에서 빼꼼히 내민 새순을 발견한 건 바로 그때였다. 


"아...."


이게 식물이, 아니 자연이 주는 위로일까,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연하고 연한, 여린 잎이 여기까지 얼굴을 내밀기 위해 너는 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아직 돌돌 말려있는 이 작은 몬스테라 잎은 앞으로도 좀 더 키를 키우며, 잎을 조금씩 펼쳐내야 한다. 여기까지 잎을 내었으니, 이제부터 식집사인 내게 필요한 건 오직 '인내' 뿐이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다른 어른 잎처럼 손바닥만 한 잎을 펼치고, 여린 잎은 짙은 초록색으로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돌아보니, 다른 식물들도 조금씩 여린 잎들을 내보이고 있었다. 여전히 자연은 생명력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잎을 내고 있구나 하는 사실에 뭉클해졌다. 온 세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힘을 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절망을 벗어날 수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생명력이 내 안에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이 주는 위로였다. 나 역시 이 거대한 자연의 일부이며, 그 강한 생명력으로 다시 새 잎을 낼 수 있으리라는 위로 말이다. 



여전히 자연은 강한 생명력으로 다시 잎을 내고 있구나 하는 사실에 뭉클해졌다. 온 세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힘을 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작가의 인기만큼이나, 방문객도 많기에 줄을 서서 그림을 감상해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나 역시 무심히 뒷사람에 밀려 밀려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순간 반 고흐의 대표작 '꽃이 활짝 핀 아몬드 나무' 앞에 섰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고독과 불행 속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몇 달 전에 그린 반 고흐의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그 그림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이 너무나 밝고 힘찼다. 그림을 꽉 채운 꽃망울을 터뜨린 꽃들도 꽃이지만, 가지 곳곳에는 아직 여린 새순들도 돋아나고 있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자신의 조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고흐가 이를 축하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 바로 '꽃이 활짝 핀 아몬드 나무'이다. 그래서인지 '꽃이 활짝 핀 아몬드 나무'에는 새 생명의 기쁨이 꽉 차 있다. 내가 그림 앞에서 눈물이 핑 돈 이유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잎을 틔우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자연의 생명력이 주는 위로 때문이었을 것이다. 


온 세상이 슬픔에 빠진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즐겨 듣는 라디오의 오프닝에선 "인생 앞에선 반드시 넘어야 할 고비가 있다. 이 고비를 잘 넘기면 또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다"며 나를 응원해 준다. 잘 모르던 이웃 분도, 선뜻 나에게 선심을 베풀어주시며 나를 위로해 주신다. 오랜만에 나타난 쨍한 햇빛과 파란 하늘도, 묵직하게 젖어있던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듯하다. 


아주 오래전 만났던 고흐의 그림뿐 아니라, 아주 오래전 읽었던 공지영 작가의 에세이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속 잊었던 글귀도 머릿속에 떠오른다. 


하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은 상처를 받고, 생명이 가득 찰수록 상처는 깊고 선명하다.
새싹과 낙엽에 손톱자국을 내본다면 누가 더 상처를 받을까.
 
...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만큼 살아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
싫지만 하는 수 없다, 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상처를 딛고 그것을 껴안고 또 넘어서면 분명 다른 세계가 있기는 하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공지영) 중에서)


내가 겪고 있는 이 '차질'의 세계를 넘어서면 또 어떤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넘어가 봐야겠다. 온 세상이 주는 위로를 받으며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본다. 


#좌절

#자연의위로

#폭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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