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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디자이너로 산다는 것

잔잔한 호수, 그 위를 유영하는 백조는 바쁘다.

by 너머


직업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아직도 스스로를 브랜드 디자이너라고 지칭하는 것이 어색합니다.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음에도,
제가 꿈꿔왔던 브랜드 디자인을 실제로 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다른 디자이너 분들 중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품고 계신 분들이 분명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브랜드 디자이너로 산다는 것


당신이 브랜드 디자이너라면,

인하우스, 커머스, 마케팅, 광고 등 어떤 산업군에 있든
업무 과정에서 반드시 불협화음을 겪게 됩니다.
타협해야 하는 순간도 분명 존재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넘기지 않겠다’는
어떤 고집스러운 기준 하나쯤은 다들 갖고 계실 겁니다.

저는 그것이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무에서는 흔히 말합니다.
디자인에 자존심을 부리지 말라고,
고고한 디자이너는 상업예술이라는 현실에서 불필요하다고요.
어떤 이는 아예, 자존심을 디자인의 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

저 역시 한동안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실리와 결과가 전부인 환경 속에서
디자인의 자존심은 사치라고 여겼고,
팀원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상업예술에서 쩐이 신이자 주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디자인에 자존심이 없으면,
그다음 10년을 그릴 수 없다는 사실을요.


이제 저에게 있어 디자인의 자존심은 영감의 원천이자,
타협하지 않는 퀄리티의 기준이며,
이 일을 계속 해나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브랜드 디자인과 BX 디자인은 다릅니다


이 글에 담긴 내용은 어디까지나
저의 실무적 경험에 기반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다른 생각이 있다면, 저 역시 존중합니다.


BX 디자이너와 브랜드 디자이너 채용을 진행하며,
또 각 포지션의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두 직무를 명확히 구분하고

이해하는 회사는 생각보다 드물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디자이너 분들도

어렴풋이 공감하실 겁니다.


제 기준에서, 브랜드 초기 구축을 주로 하면 BX디자이너, 운영 기반의 적용과 확장을 주로 하면 브랜드 디자이너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종 이런 상황이 발생합니다.

"BX 디자이너로 입사했는데 운영 디자인만 계속 하네?"
"운영 디자인을 할 줄 알고 들어왔는데 기획을 해야 하네?"


타이틀과 실제 업무가 달라지면,
디자이너는 혼란을 겪고 이직을 고민하게 됩니다.







하는 일이 다르다고 해서 본질도 다른 걸까요?


예전에는 그랬습니다.
운영 디자인을 하면 콘텐츠 디자이너 혹은 마케팅 디자이너, 브랜드 기획기반 디자인을 하면 브랜드 디자이너 혹은 BX 디자이너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대부분의 회사가 하나의 디자이너에게
A부터 Z까지를 요구합니다.

운영과 기획의 경계를 나누기보다,
둘 다 해낼 수 있는 디자이너를 찾습니다.

그래서 이제 브랜드 디자이너와
BX 디자이너는 거의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그냥 ‘디자이너’로 통합되겠죠.







브랜드 디자이너는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까요?


저 역시 늘 궁금한 질문입니다.

최근 2년간 디자인 업계는 거대한 파도를 겪었습니다.
미드저니로 시작된 이미지 생성형 AI, ChatGPT와 어도비의 생성툴,
폭발적으로 늘어난 유료/무료 크리에이티브 툴들.

이제 AI 없이 디자인을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 속에서,
브랜드 디자이너는 더욱 많은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하던 일은 줄지 않았고,
할 수 있어야 하는 일은 더 늘었습니다.

앞으로는 다섯 명이 하던 일을 세 명이,
그리고 언젠가는 한 명이 하는 것이 당연해질 겁니다.



그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저는 매일 조금씩 새로운 툴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모든 걸 섭렵할 순 없지만,

어떻게 써야 유용할지 이해하고자 노력합니다.


연차가 쌓이면 일이 쉬워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생각합니다. 직업을 잘못 고른 게 아닐까?







함께 미래를 준비하는 브랜드 디자이너 여러분,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위치가 어디든,
브랜드의 처음을 설계하든, 끝을 다듬고 있든,
그 자리에 있는 당신은 분명 브랜드 디자이너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수많은 선택들이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방향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더 빨리 적응해야 하며,
혼자서 더 멀리까지 가야 하는 순간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도 공부하고,
시도하고, 실패하면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도 열심히 살아보겠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살아봅시다.


브랜드 디자이너라는 말이 아직 어색하더라도,
그 이름이 우리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서툴러도 괜찮으니, 오늘도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만들어나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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