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3장
<코스모스> 3장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대학 때 수업을 들었던 두 분 철학과 교수님들이신데, 두 분 다 죄송하게도 성함조차 기억이 안 나지만 특이했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한 분은 1학년 교양철학을 강의하셨던 자그마한 교수님이신데, 우리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예 흑판과 마주하고 둘이서만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분이셨습니다. 분필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기호를 그려가며 뭔가를 읊조리셨는데, 안 오는 잠도 오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자셨지요. 잠결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을 들은 것도 같습니다. 또 한 분은 4학년 때 동양철학 수업을 하셨던 분이셨는데, 날씨도 화창한 날, 검은 장우산을 들고 교정을 걷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푸른 하늘과 검은 장우산의 대비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이제 얘기하게 될 과학자들 역시 교사로서는 전혀 이해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입속에서 웅얼거리며 수시로 이야기가 곁길로 빠지고 혼자 몽상에 잠기기도 했다는 케플러, 또 한 사람은 학생들을 앞에 두고도 '벽에다 대고' 이야기를 했다는 증언이 남아있는 뉴턴입니다.
과학으로서의 천문학은 점성술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인류가 수렵으로 살아갈 때 그들은 하늘에서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것들을 봤습니다. 사냥꾼, 사냥개, 곰 같은 것들을 말이지요. 사실 현대에도 사람들은 밤하늘을 쳐다보며 BTS의 누군가를 떠올릴지 모르겠어요.
천체 현상을 꼼꼼하게 관찰하는 일은 단순히 관심 이상의 절실한 필요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의 위치며 움직임을 정확하게 알면 언제 사냥을 나갈지, 언제 씨앗을 뿌릴지, 언제 수확을 할지를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늘은 인류에게 일종의 달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 법칙이 적용되는 영역으로 신비주의와 미신이 스며듭니다. 사람들은 하늘의 천체가 인간의 삶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것이 점성술의 시작이었습니다. 여러 단어들의 기원에서 점성술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데, consider(고려하다)의 어원은 '행성과 함께'라고 하네요. 진지하게 생각하려면 행성을 반드시 생각하라는 의미겠습니다.
점성술의 기원은 바로 이 사람, 프톨레마이오스로까지 올라갑니다. 그는 2세기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서 일했던 대학자인데,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내려온 점성술 전통을 체계화했다고 해요.
그는 사람의 언행, 키, 얼굴색, 성격, 선천적 장애까지도 별의 다스림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언뜻 동양의 주역을 연상시키는 세계관이어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시대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이 딱히 구별되지 않았는데, 천문학은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학문이고, 점성술은 확고한 근거 없이 여러 행성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라는 점에서 이 역시 흥미롭습니다.
프톨레마이오는 천문학자로서도 업적이 혁혁합니다. 별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밝기를 기록했으며, 지구가 구형인 근거를 제시하고,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는 공식을 확립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우주의 모형을 제시했지요.
그가 만든 투명한 천구 모형을 두고 중세 사람들은 천구가 수정으로 만들어졌고, 달, 수성, 금성, 태양 등이 붙어서 돌아가는 구로부터 일곱 개의 천국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주 한가운데 지구가 있고 지구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주축으로 만물이 그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지구 중심의 우주관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모형은 중세의 암흑시대에 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1000년 동안 천문학의 진보를 가로막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이 사람은 케플러입니다.
중세는 교회 교리의 틀을 벗어나면 추방과 고문과 죽음으로 처벌을 했던 시대였어요. 하늘은 천사와 악마가 사는 곳이며 신의 손이 행성의 천구를 돌리는 곳이었습니다. 모든 자연 현상의 바탕에 물리 법칙이 있다는 생각은 그 시대 과학계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은 대담하고 혁명적이며 또한 위험했지요. 그러나 1571년 독일에서 태어난 요하네스 케플러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었습니다.
그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신이 보시기에 자신이 너무나 비천한 존재이고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거라 생각하며 절망을 했다고 해요. 왜 그랬을까요?
(하지만 그의 신은 공명정대하고 정의의 구현만을 요구한 분노의 신이 아니라 코스모스를 창조한 권능의 신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그에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그도 평생 점성술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고 해요. 아직까지는 천문학과 점성술은 일종의 샴쌍둥이 같은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케플러는 이 세상이 신의 창조물이라면 지상의 모든 피조물 역시 신의 조화를 드러내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자세히 관찰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당연히 그에게는 정확한 천체 관측 자료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료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황실 수학자 튀코 브라헤였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관측의 귀재였어요. 케플러는 제일의 이론가였고요. 운명은 이 두 사람을 맺어주었는데, 함께 일한 18개월 동안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해요. 케플러는 그의 동료가 되고 싶었지만 브라헤는 평생 애써 모든 자료를 이 젊은 경쟁자에게 그냥 넘겨주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브라헤는 죽기 전 자신의 자료를 케플러에게 물려준다고 유언했습니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시처럼 읊조렸다고 하네요: 내 삶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가 헛된 삶을 살았다고 하지 않게 하소서!
케플러는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오랜 연구와 실패 끝에 행성 운동을 설명하는 세 법칙을 발견합니다. 어떤 내용인지는 생략하겠습니다. 너무 길고 어려워요...... 요지는, 온 우주 어디에서도 천체들은 케플러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지요.
기독교 세계의 천문학자들은 원은 완벽한 기하학적 도형이자 신성의 상징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행성들도 마땅이 원궤도를 따라 돌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케플러는 아무리 해도 행성들의 실제 궤도와 원 궤도를 일치시킬 수 없었습니다. 신의 조화를 상징하는 완벽한 원에 대한, 신성한 기하학에 대한 믿음과 과학적 현실 사이에서 그는 어렵게 선택했습니다.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원 궤도가 아니라 타원 궤도를 따라서 돈다고요. 이렇게 해서 그의 덕분에 인류는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신비주의를 배제하는 혁명적 도약을 이룹니다.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고 하네요. ‘천문학은 물리학의 일부다.’라고요.
재미있는 것은 그가 행성 운동의 속도에 따라 대응되는 음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각 행성에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대응시켰는데, 지구는 무슨 음이라고 생각하세요? (답은 책 146쪽에 있습니다^^.)
케플러도 브라헤처럼 참 감동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다수가 그른 길을 걷지 않는 한 .... 나 역시 다수의 편에 서고 싶다."라고요. 그 말 속에 담긴 갈등과 고독이 느껴지시나요. 칼 세이건은 그의 과학적 용기를 기리고자 이런 비문을 지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드는 환상보다 냉혹한 현실의 진리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케플러가 일생을 바쳐서 찾아내고자 했던 행성의 움직임과 천상 세계의 조화를 그가 죽고 36년 뒤에 한 천재가 마침내 밝혀냅니다. 그의 이름은 뉴턴.
케플러와 마찬가지로 뉴턴도 신비주의와 미신을 멀리하지 못했는데, 그의 지적 성장은 역설적이게도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의 대립과 긴장 덕분이었습니다. 20살 젊은 뉴턴은 ‘안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궁금해서’ 점성술 책을 한 권 구입했고, 그 책 안의 도면 하나를 이해하지 못해서 삼각법에 관한 책을 사서 읽었으며, 삼각법 책 속의 기하학적 논의를 따라갈 수 없어서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을 읽고 2년 뒤, 미적분학을 발명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다 아는 관성의 법칙을 발견했고, 중력의 힘, 즉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이치나 달이 지구를 도는 이치나, 동일한 중력의 힘 때문이라는 것을요.
브라헤의 관측 자료들을 바탕으로 행성 운동과 관련된 케플러의 세 법칙이 나오고, 이것은 뉴턴의 중력 법칙으로 수렴됩니다. 마치 계주를 하는 것처럼 온 힘을 다 바쳐 달려서 동료에게 바통을 넘기고 그 동료는 다시 자신의 온 힘을 다 바쳐 헌신적으로 달려 또 한 명의 동료에게 바통을 넘깁니다. 감동적인 계주는 비단 올림픽 경기장에서만 펼쳐지는 게 아닙니다.
케플러와 뉴턴은 단순한 수학 법칙이 자연 전체에 두루 영향을 미치며, 지상에서 적용되는 법칙이 천상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들은 관측 자료의 정확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자신들의 신앙과 세계관의 바탕을 뒤흔드는 것이었을지라도 말이지요. 칼 세이건은 말합니다. 오늘날의 문명과 세계와 우주 탐험은 전적으로 그들의 예지에서 힘입은 것이라고요.
죽기 전에 뉴턴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세상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나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더 매끈하게 닦인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 주우며 놀지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온전한 미지로 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