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9장
별들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노화하여 죽습니다. 사람은 부모에게서 태어나는데 별들도 부모가 있습니다. 질량이 매우 큰 별들이 자신의 일생을 폭발로써 마감할 때(초신성 폭발) 엄청난 충격파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 충격파가 주위에 있던 성간 물질에 전해지면서 성간운(별들 사이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기체, 티끌, 유기 분자로 이루어진 성간 구름)의 밀도가 증가합니다. 이것은 강한 중력(성간운의 중력 수축)을 유발하고, 이 힘으로 별이 태어납니다. 고밀도의 성간운 내부는 말하자면 별들의 '신생아실'인 것이죠.
별들은 혼자 태어나지 않아요. 무더기로 태어납니다. 태양은 지금으로부터 약 50억 년 전에 태어났고 형제자매는 열대여섯 명쯤 됩니다. 이들도 사람처럼 성장을 하면 집을 떠나 뿔뿔이 흩어집니다. 독립을 하는 것이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데, 태양의 형제자매들은 지금쯤 드넓은 우주 어디쯤에서 살고 있을까요? 대답은 '은하수 너머 어딘가에 있겠지'입니다.
그렇다면 별들은 어떻게 자랄까요? 성간운 속에서 갓 태어난 별은 팽창을 합니다. 점점 팽창하여 질량이 태양 정도에 해당하는 적색거성으로 진화할 수도 있고, 태양보다 훨씬 질량이 큰 초거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별을 팽창시키는 동력은 별의 중앙부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반응입니다. 예를 들어, 태양의 중앙부에서는 수소가 헬륨으로 변환되는 수소 핵융합 반응이 일어납니다. 성간운의 중력 수축이 일어날 때 기체 분자들이 격렬하게 충돌하면서 내부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가게 되는데, 온도가 1000만 도에 이르면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는 조건이 갖춰지게 됩니다. 핵융합을 통해서 수소 원자 네 개가 만나 헬륨 핵 하나를 만듭니다. 태양이 빛을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핵융합 반응 때문이지요.
사람이 끝도 없이 자랄 수 없듯이 별들의 성장도 한계점이 있습니다. 핵반응의 연료로 쓰이는 수소가 한없이 많은 것은 아니니까요. 핵반응은 고온 고압의 중심부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별의 운명은 별이 얼마나 큰 질량을 갖고 태어났느냐에 달려있어요. 앞으로 50억 년 내지 60억 년이 더 지나면 태양의 중앙부에 있는 수소는 모두 헬륨으로 변해서 핵융합 반응은 멈추게 된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이것으로 태양은 죽는 걸까요? 아닙니다!
사람의 인생에도 2막이 있듯이 태양에게도 인생 2막이 있습니다. 태양의 자체 중력이, 헬륨으로 가득 찬 중심핵을 짓눌러서 온도와 밀도가 고도로 상승하면 헬륨이 연소하면서 또 한 번의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인생 2막을 화려하게 살고 싶다,라는 꿈을 품은 사람은 태양을 부러워할만합니다. 태양은 외부가 급격히 팽창하고 온도는 예전보다 내려간 적색 거성으로서 화려하게 부활하거든요. 벌겋게 부풀어 오른 큰 별로 말이죠.
그러나 적색 거성으로서의 태양의 후반기 인생은 화려해도 너무 화려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태양의 바깥 대기층은 주변 공간으로 흩어져서 수성과 금성을 삼키고 지구까지 먹어버릴 테니까요. 지금으로부터 수십억 년 후 지구에서는 빙산이 녹아 해안 지대가 바닷속에 잠기고, 바닷물의 온도는 올라가 물이 증발하면서 하늘이 구름으로 덮이게 됩니다. 급기야 바다가 끓어올라 결국에는 물이 모두 증발해 버리면 지구는 곧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쯤 인류는 어떤 길을 가고 있을까요?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네요. 아직은 멀고 먼 미래의 일이지만 그런 날은 필연적으로 옵니다. 태양의 화려한 제2의 인생을 좋아만 할 일은 아니네요. 왠지 우리의 제2인생도 너무 화려하기를 꿈꾸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2의 전성기로 펄펄 날던 태양도 어쩔 수 없이 노년기를 맞이하는 순간은 찾아옵니다. 헬륨의 핵융합반응이 한없이 진행될 수는 없기 때문이죠. 태양은 약 1000년을 주기로 팽창과 수축을 느리게 반복하다가 자신의 질량 중 거의 절반을 우주 공간으로 흩뿌립니다. 밝은 형광선을 방출하는 이것을 가리켜 행성상 성운이라고 부르는데, 행성상 성운은 생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선 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중심 별 근방에는 별의 잔해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 중심별은 서서히 식으면서 계속해서 수축해 고밀도의 물질로까지 줄어듭니다. 이렇게 변한 별을 백색 왜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십억 년의 세월이 더 흐르면 남은 열기를 모두 방출해서 이제 별은 흑색 왜성이 되어 영원히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태양이 앞으로 걸어가게 될 운명의 길입니다.
별들이 모두 태양의 진화과정을 똑같이 밟는 건 아닙니다. 태양보다 질량이 큰 별은 다른 길을 걷습니다. 이들 별은 초신성이라고 불리죠. 초신성은 중심부의 압력과 온도가 태양보다 훨씬 높습니다. 그래서 여러 종류의 핵연료를 단계적으로 태우면서 매우 빠른 속도로 훨씬 격렬하게 진화합니다. 결과적으로 수명도 태양에 비해 훨씬 짧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변 행성에서 생명이 탄생해 고등 지능을 갖춘 존재로 진화할 수 있기에는 짧아도 너무 짧은... 우리는 다행히 태양이 초신성이 아닌 덕분에 이렇게 지구에서 이족 보행을 하는 지적 존재로서 행복하게 살게 된 것입니다.
게성운이라는 초신성이 있습니다. 게와 닮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해요. 이 초신성은 1054년에 폭발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구의 거의 반대쪽에 살았던 천문학자들이 아주 판이한 방식으로 이 초신성의 폭발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한 기록은 객관적 서술로, 다른 기록은 예술로요. 중국의 천문학자들은 황소자리에 갑작스럽게 새로운 별이 나타나자 손님 별(객성)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글로 이것을 기록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남서아메리카 뉴멕시코 대협곡 지대에 살던 아나사지 족은 새로 나타난 이 별을 암벽화로 그렸죠. 그림에는 초신성의 위치가 달의 왼편이었다는 것까지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상당히 자부심을 느꼈던가 봅니다. 손도장을 딱 찍어놓은 걸 보면 말이죠.
그리고 그 이름도 유명한 블랙홀이 초신성과 연관됩니다. 초신성으로 폭발하고 남은 질량이 태양보다 다섯 배 이상일 때, 그 질량 덩이가 가진 강력한 자체 중력으로 인해서 블랙홀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블랙홀은 중력이 너무 강력해서 빛도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라고 하네요. 외부에서는 블랙홀이 컴컴하기만 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블랙홀 내부는 빛으로 눈이 부실 겁니다. 아인슈타인은 블랙홀을 우주 공간에 패인 '바닥 없는 보조개'라고 비유했다고 해요. 왜 보조개라고 했을까요?
우주 공간을 신축성 있는 천으로 상상해 보세요. 여기에 구슬을 올려놓습니다. 구슬이 빙빙 돌며 홈을 만들고 천은 움푹 파이게 되겠지요. 마치 보조개처럼요. 질량이 크면 클수록 보조개도 깊어집니다. 이렇게 해서 판판한 2차원 천은 국부적으로 구부러진 3차원으로 변합니다. 이것을 3차원 우주 공간으로 확장시키면, 질량으로 인해서 국부적으로 4차원 공간으로 변형된 보조개가 만들어집니다. 질량이 크면 클수록 그 주변 공간도 더 심하게 변형되겠죠. 아인슈타인이 '바닥 없는' 보조개라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보조개라니, 아주 적절하고도 예쁜 이름입니다. 바닥이 없다니, 탐구심과 모험심을 자극하는 이름입니다.
웜홀은 벌레가 사과를 뚫고 들어가 속살을 아삭아삭 갉아먹으며 다른 구멍으로 빠져나온 통로를 가리키는 이름인데, 우주 공간에도 이런 터널이 있을 것으로 과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블랙홀은 자전할 확률이 대단히 높고, 만약 그렇다면 반드시 출구도 있을 것이라고요. 칼 세이건은 이걸 '우주 지하철'이라고 부르네요. 당장이라도 이걸 타고 우주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입니다.
9장 전반부는 분자와 원자, 전자, 중성자, 양성자, 핵, 음전하와 양전하, 척력, 핵력, 쿼크 같은 미시 세계에 대한 설명이 지루하게 이어집니다. 이 설명은 자연에 존재하는 92종의 원소를 소개하기 위한 것이고, 이 소개는 이것들 가운데 수소와 헬륨이 우주에 가장 흔하게 존재한다는 얘기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사전 지식들을 바탕으로, 수소가 헬륨으로 변환되는 과정 즉 핵융합 반응이 태양의 중심부에서 구현된다는 설명이 펼쳐집니다. 이후에 태양의 진화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우리는 별들의 삶과 죽음을 대강 훑어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코스모스의 자녀들이다.
92종의 원소들은 별 내부에서 핵융합 반응을 통해 단계적으로 (수소에서 헬륨으로, 헬륨에서 탄소와 산소로...) 합성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소들은 성간 공간으로 나가 성간운을 구성하고 있다가 강력한 중력의 힘으로(중력 수축) 새롭게 별과 행성을 탄생시키면서 그것들의 구성 성분을 이루게 됩니다. 결국 우리도 그 경로를 거쳐서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칼 세이건이 우리가 코스모스의 자식이라고 한 것은 이런 의미일 겁니다.
우주의 현상과 실체를 파악하기에는 인류가 지적으로 아직 너무 부족합니다. 현재까지의 지적 탐사로 알아낸 사실은 '은하라는 미지의 대륙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예상 밖의 구성원들이 아직 그득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사실이야말로 인류가 거둔 대단한 성과가 아닐까요?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요. 자신의 현재를 직시하는 것은 과학에서든 일상사에서든 반드시 필요한 태도 같습니다.
우주는 얼마나 '초현실적'인지
칼 세이건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누구가 현실적인 사람이네, 그런 생각은 현실적이네, 말합니다.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은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이라는 말의 정의는 뭘까요. 그건 시대마다, 장소마다, 상황마다, 또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한편 '현실'에 '초'가 붙을 때는 너무 미심쩍어서 부정적인 의미조차 붙이기를 거부하고 싶은 심리가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지금 같은 과학의 시대에는 말이죠. 그런데 과학자 칼 세이건은 우주가 초현실적이라고 말하네요. 그는 인간의 능력치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세계, 그러나 접근 가능할 수도 있는 세계, 탐험하고 싶은 세계를 이 단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부정적 색채를 전혀 입히지 않고서요. 그렇다면 누군가를 이런 식으로 칭찬할 수도 있겠습니다. "야, 그 사람의 정신세계는 참 초현실적이야!"
성경의 <욥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에게 따지고 드는 인간, 욥에게 묻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바다가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 그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너는 죽음의 문이 환히 드러나는 것과 암흑의 나라 대문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을 본 일이 있느냐?
빛의 전당으로 가는 길은 어디냐?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곳은 어디냐?
네가 천상의 운행법칙을 결정하고 지상의 자연법칙을 만들었느냐?
누가 따오기에게 지혜를 주었느냐? 누가 닭에게 슬기를 주었느냐?
누가 구름을 셀 만한 천재이냐?
산양이 언제 새끼를 낳는지 너는 아느냐?
욥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대답합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욥이 신비한 일이라고 했던 것들이 이제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신비하지 않게 됐습니다. 많은 것들이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욥의 이야기는 그 시대의 산물입니다. 그러니 그 시대에서의 초현실성은 이 시대의 초현실성으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현대에 하나님에 비견될 권능을 가진 후보는 누가 있을까요? 신비로운 우주가 가장 유력해 보입니다. 우주의 비밀은 이제 조금씩 밝혀지고 있지만 너무나 깊고 광대해서 성경 속 하나님의 권능만큼이나 신비롭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권능에서 우주 탐구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인류는 경외심을 상당히 잃었습니다. 우주를 종교적으로 숭배하기에는 우리가 과학적으로 아는 게 너무 많아서요.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은 과거 우리의 조상들보다 훨씬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든든하게 기댈 언덕이 없어졌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어쩌면 언덕을 못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요. 멀고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언덕은 우리를 떠받치고 있는데 우리가 그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요. 그리고 바로 그 언덕에서 우리가 우주를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냥 초현실적으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9장 도입부에서 인용된 과학자 아이작 뉴턴도 이와 비슷한 상상을 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는 기독교 신자이기 이전에 마음 깊이 종교적 인간이었던 듯싶습니다.
신은 물질 입자들을 다양하게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크기와 모양이 다를 뿐 아니라... 밀도가 다르고 힘의 세기에도 차이가 있어서, 신은 자연의 법칙에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었다... 이렇게 우주를 이해하니 세상에는 그 어떤 모순도 발견할 수 없게 됐다. - 아이작 뉴턴, <광학>
9장을 읽으며 태양이 참 다정하게 여겨지더군요. 별들을 대표해서 태양의 삶을 우리가 미리 다 밟아봤기 때문일까요. 소설의 주인공처럼 감정이 이입됩니다. 칼 세이건의 말처럼,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명 활동은 태양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배추와 무와 풀과 꽃들, 나무들, 그리고 우리는 태양의 무한한 빛을 받아 싱싱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은 빛으로 상징되곤 하지만, 비종교인의 눈에는 오히려 신이 빛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절망스러운 검은 밤을 빛은 밝혀줍니다. 태양은 약속을 잘 지키는 부모처럼 언제나 아침으로 찾아옵니다. '별들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은 좀 쓸쓸하네요. 그래서 '태양이 죽는다'라는 말 대신, 흑색 왜성이 되어 사라지는 날까지 '태양은 살았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비틀즈의 멤버 조지 해리슨이 어려운 시절을 보내던 중 만들었다는 곡입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그의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하네요. "... 아름다운 봄날의 아침이었어요. 4월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기타를 들고 정원을 산책했는데... 정원 바닥에 앉아 염소를 보고 해가 빛나는걸 봤어요. 아름다운 아침이었죠. 그리고 조지가 Here comes the sun 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xUNqsfFUwhY&list=PL10bx4Kxq8Bk_vq2uOX8tcvd-6jARL8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