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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Nov 10. 2023

나가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어야겠다는 절박한 요구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이 책 속에서 찾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느낌이 있었죠. 중요하지만 알 수 없는 '그것'이 방황하는 마음을 붙잡아주고 허둥대는 시선을 한 방향으로 이끌어주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혹은 중요한 인생의 정답을 알려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했던 것 같기도 하네요. 한편으로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도망자의 마음도 양념으로 조금 들어갔을 겁니다.  


현실을 감옥으로 비유했던 카프카의 단편이 생각납니다. 그는 너무나 명료하게 현실을 직시했으나 불행히도 삶의 어두운 뒷면만을 봤습니다. 실존주의자들의 비장한 현실관도  떠오릅니다. 언덕으로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리는 인간을 위대하다고 보았던 실존주의자 카뮈의 의미 부여는, 모순적이게도, 평범한 우리의 어깨를 오히려 더 무겁게 짓누릅니다. 우리의 일상은 일관되게 비극으로만 점철되지는 않으니까요. 소박한 밥상에 김이 오르는 밥 한 공기를 올리고, 김치와 김과 멸치조림 같은 소소한 반찬을 곁들여 먹는 저녁밥. 이 저녁의 풍경이 굳이 그렇게 실존적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것이 비록 눈물의 밥상일지라도요.  


이 두꺼운 책을 다 읽고 무얼 찾았나, 손을 들여다봅니다. 손에 뭘 쥐었나를요. 보니, 빈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읽은 시간과 노력이 헛된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빈손을 발견하기 위해서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어야 했던 건 아닐까, 외려 생각합니다. 물처럼 모래처럼 칼 세이건의 훌륭한 통찰의 말들은 한동안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가 소로록 빠져나갑니다. 마음이 그의 말에 잡혀있다가 나도 모르게 놓여납니다. 잡혀있다가 풀려나는 마음은 오히려 해방감이 듭니다. 그리고 남는 건 나의 빈손.  


제 마음을 붙잡아준 것은, 책 속에 있을 거라 기대했던 막연한 인생의 정답이 아니라, 한쪽 한쪽 넘어가는 책장이 아니었나 의심합니다. 제 시선을 이끌어주었던 것 역시, 읽어도 읽어도 끝나지 않는 두툼한 책의 마지막 장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어내며 보낸 시간, 그 자체가 독서의 이유였는지도요. 과연 책을 의지 삼아 시간의 한 고비를 지나간 걸까요?  


이제 책장을 덮고, 빈 손으로 저는 또 저의 자리에 있습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책을 읽기 전이나 다 읽은 뒤나 변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저의 현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만히 살뿐입니다. 지나친 의미부여 없이, 그냥 살아갑니다.  


<코스모스> 안에는 답이 없고, 어쩌면 답없음이 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에는 정답이 없음을 알고자 우리는 이 책 저 책을 연달아 펼치고 닫고 펼치고 닫는 것인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독서 행위 역시 사는 일의 한 부분일 겁니다. 매일 밥을 먹듯 그냥 책을 읽을 뿐입니다. 밥을 꼭꼭 씹어먹으면 입안 가득 단맛이 돕니다. 짭짤한 반찬도 꼭꼭 씹어먹습니다. 의미 부여를 하며 밥을 먹지는 않습니다. 책도 그렇게 읽습니다. 아, 이 책 참 맛있네, 하면서요.


그러나 <코스모스>가 저에게 준 선물이 없지는 않습니다. 저의 현실에 창문을 열어 우주의 바람을 들어오게 해 주었다는 것이죠. 그것이 중요합니다. 바람은 현실의 방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창을 통해 빠져나갑니다. 그 덕분에  현실의 방이 우주의 공기로 시원해졌습니다. 창문은 그대로 열어두렵니다. 밤이 오면 가끔은 창틀에 기대에 턱을 손으로 괴고 빛나는 별들을 올려다봐야겠습니다. 저자 덕분에 별들의 사정을 많이 들어 알게 됐으니 밤하늘에 읽어야 할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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