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13장
드디어 마지막 장입니다. 장장 700쪽에 육박하는 책을 읽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이걸 써낸 칼 세이건은 정말 대단한 학자입니다. 이제 저자가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하는지 볼까요. 책의 맨 마지막 장, 맨 마지막 구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 우리의 생존은 우리 자신의 업적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인류를 여기에 있게 한 코스모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인류를 향한 당부입니다. 인간은 수소의 재에서 시작되어 지금의 이 모습으로 진화하게 됐습니다. 138억 년 전에 빅뱅이 일어났고, 46억 년 전 지구가 탄생했으며, 지구에 생명체가 출현한 것은 40억 년 전입니다. 광대한 시공간을 가로질러 지금 여기에 인류가 존재하게 됐습니다. 칼 세이건은 묻습니다. 인간은 수백만 년 전만 하더라도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수백만 년 후에는 어떨까. 그때까지 인류가 존재하라는 법이 있을까?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낙관할 수만은 없습니다.
인류는 못된 진화적 습성을 많이 길러왔다. 호전성, 그릇된 관습,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이방인에 대한 이유 없는 적개심 같이 오랫동안 유전돼 온 못된 요소들은 인류의 생존 자체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
'못된 요소들'은 이것 외에도 많지요. 하지만 사람에게는 좋은 천성도 많습니다. 칼 세이건은 그중에서 측은지심과 탐구심을 예로 들고 있어요. 좋은 미덕이지요. 저자는 말합니다. 못된 습성과 좋은 천성 중에서 어느 쪽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할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고요.
인류가 지구의 어느 한 지역의 이해득실에만 집착한다면 우리의 진정한 미덕인 사랑과 이성의 능력은 힘을 잃습니다. 그럴 때 인간으로 하여금 이기심과 편견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시야를 열어주는 존재가 바로 코스모스가 아닐까 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광막한 코스모스의 바닷속에 감춰진 새로운 세상과 가능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지구는 극단적 형태의 민족우월주의, 우스꽝스러운 종교적 광신, 맹목적이고 유치한 국가주의 등이 발붙일 곳이 결코 아니다. 별들의 요새와 보루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눈에 띄지도 않는 작디작은 푸른 반점일 뿐이다.
우리가 눈을 지상이 아니라 우주로 향할 때 우리의 시야는 활짝 열립니다. 칼 세이건은 이 마지막 장에서 핵전쟁에 대한 우려를 진지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상호 불신으로 인해서 만약 핵전쟁이 터지면 인류는 멸종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아직까지 전면적인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것은 단 한 번밖에 경험할 수 수 없는 전쟁입니다. 한 번으로 모든 게 끝나는 전쟁이니까요.
칼 세이건은 영국의 기상학자 리처드슨이 쓴 <죽음에 이르는 분쟁들의 통계학>을 소개합니다. 리처드슨은 전쟁에는 모종의 규칙성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전쟁도 날씨처럼 이해와 통제가 가능한 하나의 자연 체계라고 보았어요. 날씨는 예측할 수 있습니다. 전쟁도 그렇다고 본 거지요. 리처드슨은 전쟁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서 1820년에서 1945년까지의 전쟁 자료를 모두 수집한 뒤, 희생자 수를 기준으로 전쟁등급 M을 정의했습니다. 예를 들어, 등급 M=3의 전쟁은 1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소규모 분쟁, M=5은 10만 명, M=6은 100만 명, 이런 식으로요. 제1,2차 세계대전은 더 높은 등급의 전쟁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희생자가 많은 전쟁일수록 그다음 전쟁이 일어나기까지는 더 긴 시간이 걸립니다. 이렇게 해서 지난 150년 동안 벌어졌던 전쟁 자료를 근거로 하나의 전쟁 발발에서 다른 전쟁의 발발까지 걸리는 시간과 전쟁 등급 M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그래프로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칼 세이건은 말합니다. 전쟁과 살인은 동일한 성격의 현상이라고요. 개인 단위의 살인과 최대 규모의 전쟁은 연속적인 현상의 양끝인 셈입니다. 사람은 생존에 위협을 느낄 때 분노하고 분노가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살인까지 가는 경향을 보입니다. 국가가 같은 종류의 위협을 받을 때 국가도 살인적 분노에 휘말리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그 예를 보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정말 복잡합니다. 누구는 땅따먹기라고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만은 없는 역사인 것 같습니다. 이곳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애쓴 지도자들은 여지없이 피살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모든 걸 떠나서 특히 어린아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것은 어떤 말로도 용서가 안 됩니다.)
칼 세이건은 리차드슨의 곡선에서 빗금 친 부분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 부분은 리처드슨 곡선이 변화할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리차드슨의 곡선은 전쟁의 희생자 수에 근거하여 그려진 것인 이상, 전쟁 기술의 발달로 희생자 수가 급격히 늘어날 때 그의 곡선은 예상과 다르게 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 무기는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를 가리지 않고 혁명적으로 발전돼 나가고 있고, 각 국가는 군수 산업에 많은 예산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저자가 걱정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언론 장악의 위험성입니다. 칼 세이건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이것을 경고했습니다. 국가가 매스컴의 근간을 틀어쥐고 있으므로 국민을 쉽게 선동하여 전쟁으로 몰아갈 수 있다, 라고요. 바로 지금, 이 부분을 우리 국민은 대단히 우려하고 있지 않나요.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의 격렬한 분노는 아주 먼 옛날 진화과정에서 만들어져서 아직도 우리 머리 깊숙한 곳에 남아있는 파충류의 뇌, 소위 뇌의 R-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감정의 중재와 기억의 관장은 진화의 가장 최근 단계에서 발달한 포유류와 인간의 뇌, 즉 변연계와 대뇌피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갈등은 파충류의 뇌와 포유류의 뇌가 벌이는 대립의 소산인 셈이다.
칼 세이건은 오늘의 지구 문명을 외계인들의 관점에서 조망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우주인들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지구 곳곳에서 진행 중인 군비 경쟁의 당위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고요. 아인슈타인은 전쟁을 일종의 소아병이라고 불렀다고 하네요.
인류의 역사가 전적으로 비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인류는 느리지만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스스로를 개선시켜 왔습니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오던 노예 제도가 최근 200년 사이에 거의 사라진 것이 한 예입니다. 저자는 '인간의 야수성'을 우리가 스스로 고쳐왔다고 믿습니다. 그의 믿음은 인간의 과학적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말하는 과학은 두 가지 고유한 특성이 있습니다:
1.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교정할 수 있다.
2. 과학은 모든 분야에 적용가능하다.
그리고 과학하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두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1. 신성불가침의 절대진리는 없다. 가정은 모조리 철저히 검증돼야 한다.
2.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은 무조건 버리거나 일치하도록 수정돼야 한다.
그는 말합니다. 코스모스는 있는 그대로 이해돼야 하며, 있는 그대로의 코스모스를 우리가 원하는 코스모스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살 수 있다면 지구적 문제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까지도 상당 부분 평화적으로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은 편협한 나만의 우물에서 빠져나와 마침내 해방되지 않을까요!
칼 세이건은 오늘날의 인류 문화는 지난 45억 년에 걸친 행성 진화의 관점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지구라는 좁은 차원에서 벗어나 훨씬 넓고 큰 맥락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것이 미래의 재앙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제 생각에,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기준은 보편성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나와 몇몇 사람에게만 옳은 얘기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제가 보기에, 좋은 글입니다. 그리고 한 분야만 아니라 많은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 또한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을 말하는데 문학에도 들어맞고 철학에도 들어맞고 더 나아가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도움이 될 때, 그것이야말로 좋은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참 좋은 글입니다. 좋은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생각하며, 그의 다음 말로 <코스모스> 읽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사람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와 조금이라도 다른 성격의 사회를 믿을 수 없는 기괴한 존재로 간주하며 심히 혐오하고는 한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방'이나 '외계'라는 표현의 부정적 뉘앙스는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잘 드러내 준다. 그렇지만 각기 다른 문명들이 보여주는 문화와 유적의 다양성은 '인간으로 되어 감'의 다른 방식을 우리에게 시사할 뿐이다. 외계 문명인에게는 인류 사회의 차이가 유사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인간은 지구라고 불리는 이 자그마한 행성에서만 사는 존재다. 우리는 희귀종인 동시에 멸종 위기종이다. 우주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 하나하나는 모두 귀중하다. 수천억 개나 되는 수많은 은하들 중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