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처음으로 텃밭을 하면서 씨앗들을 샀습니다. 세어 보니 20종이 넘네요. 이것도 뿌려보고 싶고 저것도 뿌려보고 싶어서 사다 보니 이렇게나 많습니다. 뿌리면 다 잘 자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어떤 것들은 기대대로 잘 컸는데 어떤 것들은 새싹 구경도 못 했네요.
아무튼 그 덕분에 씨앗들이 저마다 개성 만점이란 걸 알았습니다. 씨앗은 모두 동그랗고 까맣지 않나? 아니에요. 아닙니다! 저 작은 씨앗들이 얼마나 맵씨가 있는지 몰라요.
이건 적상추 씨앗입니다.
굉장히 작아요. 0.5밀리 정도 될까요. 이렇게 작은 씨는 흙에 섞어 뿌리면 좋습니다. 그러면 뭉텅이로 흙에 떨어져서 빡빡하게 자라는 불상사를 피하게 되지요.
보세요, 씨앗을 확대해서 찍어보니 세련된 줄무늬가 있습니다. 베이지와 진회색의 배합이 아주 멋들어져요! 너무 작아서 사람들이 볼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게 진짜 아쉽습니다.
3월 초에 집에서 모종 트레이에 씨를 뿌려 싹을 틔운 다음, 밭에 옮겨심기를 했어요. 모종이라고 하기도 민망하리만큼 여리여리해서 녹아버리지 않을까 했는데 일부가 기적적으로 이렇게 자라고 있습니다.
왼쪽은 로메인 상추고 오른쪽은 적상추예요.
이건 열무 씨앗입니다.
작년에 초록색의 번득거리는 씨앗이 봉투에서 쏟아져서 깜짝 놀랐어요. 너무 인공적으로 보이지 않나요? 자연색이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다니, 놀랍습니다. 전 여전히 저 번득거림에 적응이 안 돼요. (호랑작가님께서 알려주셨어요. 원래 열무 씨앗은 이런 색이 아니고 종묘회사에서 소독처리를 해서 이런 색을 띄게 된 거라고요. 그랬구나, 열무 씨야… 네 맨얼굴을 보고 싶다.)
하지만 아우, 예뻐라, 감탄하는 분이 여기 계십니다. 바로 까치입니다^^ 밭을 돌아다니며 씨앗을 파먹어서 까치는 밭에서 미움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이건 고수 씨앗입니다.
너무 예쁘지 않나요? 편애가 심하다고요? 하지만 보세요, 동그랗고 오돌하게 주름이 진 모습 하며 색깔 하며...
고수 씨앗도 아주 작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잘 보시면 쪼그만 껍질이 쪼개져서 더 쪼그만 그릇이 하나 만들어졌습니다! 저 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 아주 작은 사람이 있다면 재밌겠죠?!
고수는 호불호가 있는 채소예요. 전 '불호'였다가 급격히 '호'로 돌아선 1인입니다. 씨앗도 예쁘지만 싹이 정말 잘 트고 정말 잘 자라서 말이죠. 심지어 꽃까지 봤습니다. 씨앗만큼 작은 흰 꽃들이 오소소 하게 모여서 핍니다. 오소소 하게 모이는 게 뭐냐면... 꽃이 피면 보여드릴게요.
고수 향이 벌레들을 쫓는다길래 작년에 밭 여기저기에 심었는데 효과는 미지수입니다.
냉장 쌀국수를 사다가 고수를 넣어서 먹어보니 꽤 그럴듯했습니다. 올해도 그러고 싶습니다.
고수 씨의 특징이 뭔지 아시나요? 2인 1조라는 거예요. 동그란 껍질 안에 두 개 씨앗이 딱 붙어서 들어있습니다. 누구는 씨앗을 쪼개서 심으라지만 그냥 심어도 싹이 잘 납니다.
무슨 씨앗 같나요?
마치 청록색 광물 같지요. 열무 씨앗처럼 이 씨앗도 봉투에서 쪼르르 나오는 순간, 놀랐어요. 작년에 햇빛 아래서 본 씨앗은 훨씬 화려한 청록색이었던 것 같은데, 냉장고에서 1년을 묵혔더니 제가 기억하던 그 청록색이 아니네요. 제 기억 속 씨앗은 보석처럼 더 진하고 더 화려한 청록색이었는데요.
그런데 저 씨앗에서 어떤 식물이 자랄 것 같나요? 어떤 색깔의? 바로 비트입니다. 새빨갛고 동그란 무 말이에요. 비트 색은 24색 물감세트에 들어있을 법한 빨간색이죠. 비트는 씨앗도 뿌리도 강렬하고 진한 색을 품은, 그야말로 색깔의 여왕입니다.
이건 들깨와 바질 씨앗입니다.
왼쪽은 들깨 씨, 오른쪽은 바질 씨입니다. 들깨 씨를 확대해 보니 그물 무늬가 있네요. 바질은 짙은 숯 색깔입니다. 바질 씨는 참깨보다 작아요. 새끼쥐의 똥이 이렇게 생겼을 것만 같지만... 본 적이 없어서... 보고 싶네요…
프랑스의 유명한 요리사가 들깨를 아시안바질이래나 뭐래나 이름 붙여서 요리에 쓴다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절대적으로 다른, 독특하고 강한 향을 풍기는 이 두 채소는 사랑입니다.
이건 카모마일 씨앗입니다.
카모마일은 허브차로 마시죠. 불면증이 있는 분들은 카모마일 차를 마시면 좋다고 하네요.
밭에서 꽃을 따서 말려 차로 만들어 보리라~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작년에 밭에 뿌렸다가 포기했어요. 일단, 씨앗이 아주 작은데 그냥 대충 뿌렸다가 뭉텅이로 자라는 바람에 꽃이고 뭐고 정신없이 뒤엉키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심란해서 그만 뽑아버렸어요. 그 모습을 떠올리니 또 심란해집니다.
카모마일 꽃은 이렇게 생겼어요.
카모마일은 국화과라고 해요. 들국화보다 꽃이 작습니다. 카모마일아, 미안하다...
이건 아욱 씨앗입니다.
납작하고 동그란 외형에 신라 토기에 있을 법한 무늬가 있어요. 확대해서 보지 않았다면 저도 몰랐을 저 예술성에 감탄을 하게 되네요.
아욱도 고수처럼 텃밭을 하기 전에는 좋아하지 않았던 채소인데 '불호'에서 '호'로 돌아선 이유는 다릅니다. 아욱의 떡잎이 너무 예뻐요! 꼭 유치원생들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뭘 골라볼까요? 바로 옥수수입니다.
옥수수 씨앗은 누가 봐도 옥수수입니다. 그런데 이 옥수수는 좀 특별해요. 이름하여, 미니흑찰옥수수입니다. 이름에 특별함을 다 담아냈네요. 미니+흑+찰+옥수수.
옥수수는 대개 2미터까지 큰다고 해요. 그래서 텃밭에서 키우려면 눈치가 보입니다. 남의 텃밭에 그늘을 만들기 때문이죠.
옥수수를 키워보고 싶어서 궁리를 하다가 이 품종을 알게 됐습니다. 작게 자란다는 말에 얼른 주문해서 작년에 심었어요. '작다'라는 게 순전히 상대적이라는 걸 이 옥수수를 통해서 확실하게 배웠죠. 1.5미터까지 자라더라고요. 여전히 큽니다.
열매도 상대적으로 '작아요'. 다른 옥수수의 절반 크기입니다. 대략 10센티쯤 될까요? 손에 쏙 들어와요. 하나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죠. 그래서 자꾸만 손이 갑니다.
따글따글하게 씹히는 조그만 옥수수가 까맣기까지 해서 정말 귀엽습니다. 깐돌이란 이름을 붙이면 딱 좋을 것 같은 옥수수예요.
요걸 올해 심을 생각을 하니 조바심이 나서 못 참겠어요. 어서 심고, 어서 자라고, 어서 열매를 맺어서, 어서 껍질을 까보고, 어서 웃고 싶다...
자꾸 웃고 싶어지는 옥수수! 고소한 웃음이 담긴 옥수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