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반.
텃밭의 하늘은 드넓고 역동적이며 고요합니다.
그리고 묵직합니다. 빛과 어둠이 섞인 검푸른 기운이 풍경을 지그시 누르고 있어요. 손수레의 노랗고 파란 색도, 싱싱한 호박잎의 초록도, 여름 산의 푸르름도 차분합니다. 검은 밤을 통과하여 빛의 세상으로 나오기 직전, 모든 생명이 아직 명상 중입니다.
새벽은 지극히 사적이며 깊고도 고요한 시간입니다.
새벽이 사람에게 중요한 시간이듯 자연에게도 새벽은 중요하다는 걸 알겠습니다. 조용한 전환의 순간, 풍경의 빛이 제 눈으로 들어와 마음을 검푸른 색으로 물들입니다. 공기가 차고도 깨끗합니다.
주말 농장이 온통 잡초로 뒤덮여있네요. 텃밭으로 가는 길까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비가 계속 내려서 사람들이 텃밭을 자주 찾지 않았나 봐요. 길도 진창입니다. 장화를 신었지만 진흙 속에 발을 디디고 싶지 않습니다. 성격이 깔끔한 사람은 절대 텃밭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예요.
제 텃밭에 오자 첫눈에 들어오는 것, 역시 하늘입니다. 새벽하늘이 텃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선 토마토가 남산의 소나무처럼 비장하네요. 한낱 일 년생 작물에서 소나무의 위엄이 느껴집니다.
그다음으로 눈이 가는 것은 잡초!
그다음에는 활발하게 꽃을 피우고 있는 방풍이 눈에 들어오네요.
그 주변에서 자라던 어린 아욱들은 모두 시들어 죽었어요.
미나리도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미나리 꽃은 처음 구경합니다. 방풍 꽃, 고수 꽃과 비슷하게 생겼네요. 오종종한 흰꽃들입니다. 식물학적으로 이런 식의 꽃모양을 부르는 명칭이 따로 있겠지요.
꽃대가 자라면 잎이 억세져서 먹기 나쁘다고 합니다. 하지만 식물들에게 꽃을 피우는 건 사활을 건 일일 거예요. 생명을 이어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왜 굳이 생명을 이어가야만 하지? 그게 왜 중요하지? 저는 의문이에요. 원래 염세적인데 최근 더 염세주의자가 되어서 저는 생명주의에 대해 깊은 의문을 느낍니다. 하지만 저의 회의와는 별개로 자연은 생명력으로 돌아갑니다. 방풍나물이 빗속에서도 활발하게 꽃을 피우듯, 자연은 생명이라는 주제로 짧은 가곡이 아니라 웅장한 교향곡을 연주합니다. 저의 염세주의는 그 음악 속에서 일탈하는 음표 하나일 뿐입니다.
밭을 전체적으로 보고 나니 이제 생각나는 작물들이 있네요. 시들시들 아팠던 바질은...
다행히 살아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편이 애지중지 키우던 애플수박은 돌아가셨습니다.
놔주어야겠지요? 놔주지 않을 도리가 없고요.
호박과 오이도 그럭저럭 자라고 있긴 한데 이제 최전성기는 지난 것 같아요. 그래도 여전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쓰고 있네요. 식물의 노력이 애틋합니다. 식물이야 뭐 애틋함이란 감정을 알겠어요? 다만 제가 그런 마음을 투사하기 때문이겠지요.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아스파라거스가 믿음직하게 서 있습니다. 올해는 번성하라고 순을 하나도 잘라먹지 않았더니 저렇게 잘 자랐습니다. 튼튼한 순이 또 하나 올라오고 있네요.
이건 서리태라고 불리는 검은콩이에요.
강낭콩과는 다른 모습이네요. 저는 처음 키워봐서 신기합니다. 잎사귀 모양이 강낭콩 잎보다 더 동그랗습니다. 무척 정겹고 귀엽네요. 콩잎으로 장아찌도 담근다는데요. 잎을 따면 콩은 어떻게 자라라고... 초보인 저로서는 한 잎 한 잎이 다 귀중해서 콩잎을 딴다는 건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옥수수는 잘 자라고 있네요. 아직 수염이 시들지 않았어요. 수염이 완전히 시들어야 충분히 익었다는 표시라는데, 작년에 아주 잘 자라주어서 올해도 그러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충 작물들을 살펴봤습니다. 토마토 열매는 껍질이 터져서 못 먹게 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들깻잎도 무성해서 땄고요, 오이는 하나, 고추는 여러 개를 땄습니다.
옥수수를 시기를 달리해서 두 세 차례 심어줬더니 큰 것 아래 작은 것들이 옹기종기 마치 가족처럼 자라고 있네요. 이 모습이 <어느 가족>(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라는 영화를 연상시킵니다.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들이 마치 3대로 구성된 가족처럼 한 집에 모여 살고 있는데, 영화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펼쳐놓습니다. 그러면서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집니다.
크고 작은 옥수수들, 옥수수와는 다른 과에 속하는 파와 들깨와 토마토가 주변에서 무리 지어 있는 모습이 마치 '어느 가족' 같습니다. 저 식물들은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조용히 인정하고, 다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지요.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어우러진 모습에서 저는 '포용'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가족에 대한 확고한 정의는 없는 것 같아요. 가족이란 반드시 어때야 한다는 정답도 없지 싶습니다.
가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달리 해봅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가. 어쩌면 포용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그리고 포용은 관념적으로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고 실천적으로는 '다정함'으로 드러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최근 한 달 동안 비도 왔지만 사정이 있어서 텃밭에 자주 들를 형편이 안 됐습니다. 일주일에 겨우 한 번 바쁘게 텃밭을 찾았습니다. 8월이 되고 장마가 그치면 시간을 더 낼 수 있기를 바라며 틈틈이 가을 재배를 상상(!)하고 준비합니다.
쪽파 뿌리예요. 이걸 종구라고 부르더라고요. 온라인으로 500그램을 샀습니다. 벌써 싹이 나온 것도 있네요. 지금 심으면 가을에 먹을 수 있고 한 달 뒤에 심으면 김장 담을 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란다고 해요. 월동을 시켜서 다음 해 봄에 먹을 수도 있다는데, 월동한 쪽파의 맛은 남다르다고 하지요. 저는 500그램을 반씩 나눠서 한 달 간격으로 심어볼까 해요.
텃밭 빈자리가 좁아서 참 다행이에요. 욕심과 호기심이 끝이 없어서 온갖 걸 다 심어보고 싶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몇 개만 추렸어요. 수북한 씨앗봉지들 중에서 골라낸 최종 당선자들은 다음입니다.
<미스 럼피우스>라는 그림책이 있어요. 루핀부인이라고 불리는 주인공이 바닷가 작은 집에 살면서 주변에 꽃씨를 뿌려서 온통 꽃밭으로 만드는 이야기예요. 제가 되고 싶은 사람은, 지금은, 루핀부인입니다.
그리고 미국 개척시대에 사과 씨를 자기가 가는 곳마다 심고 다녔다는, 아주 유명한, 애플시드라는 사람도 있어요. 제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애플시드이기도 하네요.
별로 궁금하시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씨앗 봉투를 뒤집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봉투 뒷면에는 과거에 제가 전혀 모르던 지식이 담겨있었어요. 작물의 특성과 주의사항과 재배시기에 대한 정보들이에요.
모든 봉투 뒷면의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요약하자면, '씨앗마다 모두 제 시기라는 게 있고, 자신만의 속도와 특성이 있다'입니다. 이 말을 보편화시키면, '우리는 모두 다르다'가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