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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방죽 가는 길

by 스프링버드 Feb 16. 2025


여행을 갈 때, 시장을 갈 때, 친구를 만나러 갈 때, 가는 곳과 할 일에 따라 몸도 옷을 고르지만 마음도 옷을 고른다. 산책을 나설 때면 마음은 파스텔조 부드러운 색조를 입는다. 땀을 흘리며 에너지를 쓰고 싶어서 나서는 운동 겸 산책일 때조차도 마음은 헐렁하고 느긋하다. 최근에 발견한 안산 방죽으로 가는 산책길은 조금 다른데, 말하자면 마음이 옷깃을 여민다. 그곳에 특별히 경배할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집을 나서는 첫걸음부터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단정한 마음이 된다.


안산 방죽. 최근에 이곳을 발견하고 왠지 모르게 기뻤다. 안산둘레길을 걷다가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안산방죽 표지판을 봤는데, 그날은 그냥 지나치고 며칠 뒤 혼자 방죽을 찾아갔다. 방죽이라니. 도시에서 듣기 힘든 이름의 이곳 정체가 궁금했던 이유도 있고, 홍제천 산책로의 반환점으로 나름 정해놓은 인공폭포까지의 산책길이 좀 짧은 듯해서 좀 더 긴 반환점을 찾고 있던 참이기도 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안산 방죽은 인공폭포 옆으로 열어놓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나온다. 그 길은 안산자락길로 통하는 길목인데, 적당히 가파르고 무엇보다 구성미가 있다. 심심치 않게 갈라지는 길의 구성이 그렇고,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맛도 나지만 아름다운 정원의 묘미도 살려놓았다. 아직 겨울이라 정원은 잠들어 있다. 봄부터 색색의 허브가 자랄 예정이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서 길 옆을 보니 계곡물이 투명한 얼음 사이로 졸졸 흐르고 있다. 눈이 희끗하게 남아있는 차가운 겨울날이다.


외길은 문득 두 갈래로 갈라진다. 이쪽으로, 이리로 오라고, 오른쪽 길이 나를 부른다. 여유롭게 늘어져 둥글게 돌아가는 길. 하지만 나는 곧고 가파른 왼쪽 계단길을 택한다. 오늘 나는 안산 방죽으로 가니까. 오늘 나는 단정한 마음이니까. 숨이 깊숙이 들이쉬어지며 가빠지는 계단을 오르며 나는 더 단정해지고 싶으니까.


 

브런치 글 이미지 2



몸은 기울어지고 숨은 가빠져 자연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게 만드는 길이다.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파란 하늘. 아기 손바닥보다 작은 얊은 흰구름과, 빈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낮달이 떠있다. 높은 길이 열어주는 시선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계단을 다 올라도 방죽은 금방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세로로 올라온 길은 가로로 난 평지의 길을 만나는데, 길은 여러 번 휘어져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또 왼쪽으로 자꾸만 곁을 끼고 걸음을 돌게 만든다. 세심히 다듬어진 길이 나랑 밀당을 하자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는 작은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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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자리에 얌전히 들어앉았다. 산자락 한 귀퉁이에 계곡물을 둑으로 가두어 만든 자그마한 이 연못에 방죽이라는 예스럽고 낯선 이름이 붙었다. 도시에 웬 방죽이람. 아무 효용이 없을 자리에 물을 모아놓은 이유가 무얼까. 오른편으로는 위에서부터 산자락이 내려오고 왼편으로는 여기로부터 더 아래로 산자락이 내려가는 자리, 산비탈에 잠시 물이 쉬어가라고 만들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고요히 멈춘 물에 하늘이 비친다. 깊은 산속이 아니어서, 하늘이 환하게 트여있다. 기하학적 도형의 나무 데크 덕분에 물의 모양도 도형이 되었다. 물은 얕다. 봄이 되면 물풀이 자라리라. 붓꽃일지 연꽃일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는데 잘 상상은 되지 않는다. 실제의 봄 풍경은 아마도 훨씬 화려하거나 훨씬 상큼하거나 훨씬 소박하거나, 어느 쪽으로든 '예쁘다'란 말이 잘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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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작은 방죽이라 주변을 걷는다는 말을 하기가 좀 무색하다. 물가 귀퉁이에 숨은 듯 작은 벤치가 있다. 봄이 되면 저 벤치에도 한참 앉아있어 보리라. 봄이 되면, 봄이 되면, 봄이 되면이란 말을 자꾸 하게 만드는 소박하고 정다운 연못이다. 데크를 천천히 걸어 고인 물을 보고, 물에 낀 살얼음을 보고, 물에 비친 하늘을 보고, 저 위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을 본다. 이제 돌아가야지.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다.



브런치 글 이미지 6



내려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방죽 옆으로 길게 난 높은 계단길을 오른다. 계단도 자연석이 아닌 나무 계단이라서 방죽까지의 동선은 내내 등산이 아니라 산책에 어울린다. 저 계단을 다 오르면, 보이지 않는 그 너머에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전혀 모르는 세계가 있을 것만 같다. 상상도 되지 않는 세계. 놀라운 세계. 혹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 NOWHERE. 그런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현실감은, 모르는 척, 짐짓 주머니에 넣어두고, 수십 개의 나무 계단을 오르는 동안만큼은 꿈을 꾼다. 아무 곳도 아닌 곳을 향해, 무를 향해, 의미로부터 벗어난 몸짓으로 계단을 오른다. 어디에도 없지만 어딘가에 있을 세계를 단지 꿈꾸면서. 더 적합한 표현은 그냥 멍~하게.  


그러고 보니 방죽은 효용이 없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비춰본 것 같다.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그렇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이 차서 당도한 그곳에서 비춰볼 게 뭐가 있겠나. 마음밖에는. 그리고 숨을 고르고, 좀 더 정화된 마음으로, 더 단정해진 마음으로, 계단을 올랐을 것이다. 안을 다 비우고 빈집 같은 마음으로 높은 곳을 향해서, 겸손하고 성실하게. 어쩌면 걸어 올라가는 걸음 그 자체가 겸손과 성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산을 내려가는 대신 방죽 옆 높은 계단을 오르게 이끄는 건 마음이 시키는 일이다. 마음은 워낙 그렇게, 높은 곳을 지향하게끔 만들어진 거라서 나도 모르게 내 몸이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 서울 시내에 또 한 곳의 연못이 있어서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서울에서 연못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홍은동으로 이사오기 전, 예전에 오래 살았던 동네에서 자주 찾던 곳입니다. 안산 방죽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연못을 즐겨보세요^^


https://brunch.co.kr/@mypoplar/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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