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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Aug 31. 2022

무거버거

국내편

어느 책에서 말하길 사람들에게 행복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야자수와 바닷가와 파란색 음료를 떠올린다고 한다. 나도 동의한다. 풀장 안에서 술을 마실 수 있는 바가 있다면 더 좋겠다. 그런 게 낙원 아닌가. 그런 데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미국 본토에 사는 내 친구들은 내가 하와이에 살기 때문에 지상낙원에서 하루하루가 계속되는 바캉스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가 매일 바닷가에서 칵테일을 마시고, 매일 서핑을 하고, 엉덩이를 흔드는 훌라춤을 추면서 사는 줄 안다. 미친 거 아냐? 하와이에 살면 인생을 즐기기만 하는 줄 아나? 우리의 가족도 마찬가지로 막장이고, 여기 사는 사람들도 똑같이 암에 걸리고, 똑같이 아프고, 마음이 아픈 일이 생기는 것도 똑같다. 나는 서핑을 안 한지 15년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23일 동안 나는 링거와 오줌통의 연속인 "낙원"에 살고 있다. 낙원? 좆 까고 있네


내가 인생 영화로 꼽는 디센던트의 인트로에 흘러나오는 주인공의 독백이다. 아무래도 삶이라는 건 결국 하와이에 살든 아니든, 어마어마한 물질적 부가 있든 없든 사람이 사는 현실에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풀기 어려운 골칫거리인 모양이다.


서른두 살이 되던 해에 첫 회사를 관두고 꽤 긴 공백을 가진 적이 있다. 세계일주랍시고 몇 개월이나 해외를 떠돌다가, 돈이 떨어질 때 즈음 다시 돌아와 취업을 했는데 우연히도 본사가 제주도에 있는 회사였다. 그때 나는 야자수 아래 바닷가에서 파란색 음료를 마시며 코딩하는 개발자의 모습을 상상했다. 


입사 후 1년 정도가 지났을 때 기회가 왔다. 웬일인지 제주도에 이주했던 직원들이 대부분 육지로 귀향해버린 것. 덕분에 제주도 오피스가 텅텅 비어 유지가 힘들어진 거다. 원하는 팀은 제주도에서 일정기간 근무를 할 수 있는 제도가 생기자마자 팀원들을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2016년에 처음으로 제주도에서 6주를 살았다. 


제주도에 간 첫 해에는 제법 시행착오를 겪었다. 저녁시간은 텅텅 비었는데 노트북 말고는 내 물건이 아무것도  없는 기숙사에서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주말은 어떤가. 처음 몇 주는 관광객처럼 지냈다. 같이 내려온 동료 들과 차를 빌려 제주도 구석구석을 다녔다. 딱 두 번. 그리곤 각자 방에서 나오지 않게 되었다. 당시 입사하자마자 제주도로 내려와 같이 지내던 인턴의 일기장에는 그 당시의 느낌이 이렇게 적혀있었다. "너무나 조용해서 숨이 막힌다" 


느리게 사는 법을 깨닫기 시작한 건 그다음 해 제주도에 갔을 때였다. 두 번째 제주살이 때는 관광을 멈추고, 각자 자기만의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걷기를 좋아하던 동료는 온 올레길을 돌아다녔고, 서핑을 하겠다며 주말이면 중문에 들어가는 동료도 있었다. 글쓰기가 취미였던 나는 주말이면 꼭 카페에 가서 두어 시간을 보내고 오곤 했다. 그제야 섬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 버스를 타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다. 처음에는 제주시 구도심에서 신도심으로 가는 정도였으나 점점 반경을 넓혀갔다. 제주시에서 316번을 타고 한 시간을 가면, 종점인 삼양해수욕장에 도착한다. 거기서 한 시간에 한대(일정하지 않다) 정도 있는 간선버스로 갈아타면, 어떻게든 함덕해수욕장 까지는 갈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에 있는 서우봉을 돌아 천천히 반대쪽 해변길을 걸었다. 오전 11시. 언덕 위의 넓은 잔디밭에는 주말시장이 열렸는지 사람들이 붐볐다. 주인을 따라 나온 개들의 꼬리가 끊어질 듯 바쁘다. 아직 해가 뜨겁지 않은 계절이라 그런지, 이제 막 머리 위에 올라선 태양빛에 황금빛 털이 춤을 춘다.


그렇게 해변을 따라 한참을 걷다 해수욕장이 끝나는 곳에 닿았을 때 조금 특이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겉으로 보면 간판은 없지만 야외에 앉아있는 사람들로 보아 식당이 분명하다. 자세히 보니 낮은 돌담 너머 야외에서 버거를 먹고 있다. 주말 점심시간이지만 손님이 그리 많진 않다. 돌담길로 된 입구 안쪽에 검은색 페인트로 BURGER COFFEE라고 커다랗게 써진 2층 판자 건물이 보였다. 1층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고깃집인가 싶을 만큼 연기와 고기 냄새로 가득하다. 좁은 주방에서 직원 세명이 서로 등이 닿을 듯 말 듯 바쁘게 오간다. 메뉴는 단 3가지. 마늘 버거, 당근 버거, 시금치 버거. 셋 다 제주도에서 많이 나는 재료다. 


순간 몇 해전 밀라노에서 갔던 버거샵 'FUD' 가 떠오른다.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서 탄생한 가게로, 시칠리아의 밀로 된 빵과 시칠리아 토착종 소와 닭, 채소까지 오로지 시칠리아 산 재료로만 만드는 토종 로컬 푸드 음식점이다. 이탈리아에서 파스타나 피자가 아닌 버거라니 의아했지만,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압도당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마치 옥스포드 대학의 도서관에 들어온 듯 거대하고 정갈하게 꽂혀있는 지역 특산품과 와인들. 버거도 버거지만 공간이 환상적이었던 곳이었다.


그렇다면 무거 버거도 로컬 푸드라고 봐야할까? 아직 가게를 지어나가는 중인지, 1층에는 주방만 있는 듯했고, 2층은 나무 처마가 있는 야외석과 실내가 있었다. 바다를 향한 창문의 벽은 코르크로 되어 있었는데 군데군데 페인트 도장이 찍혀있다. 건물 뒤쪽으로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군데군데 짓다 만 건지 폐허인지 모를 판자 건물들이 눈에 띈다. 특이한 위치에 특이한 가게다. 함덕 해변의 길이만 해도 1km에 달하는데, 이래서야 모르는 사람이 발견하기엔 글렀다. 그렇지만 흥미가 생긴다. 시금치와 당근이라니. 적어도 버거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조합이 아닌가. 


나는 시금치 버거를 주문했다. 마치 송편을 연상시키는 초록빛의 번이 인상적이었는데, 볶은 시금치와 시금치 소스가 들어가는 걸로 모자라 번도 시금치 번이란다. 버거는 손잡이가 달린 도마 같은 나무판자에 올려져서 나왔다. 주방 배수구 트랩 같이 생긴 플라스틱 통에 들어가 있는 감자칩도 특이하다. 제일 특이한 것은 역시나 번. 색깔부터 나 시금치로 만들었어라고 말하고 있다. 반죽이 아니라 색소였다면 이렇게 색깔이 얼룩덜룩하지 않았을 거다. 별도로 기름칠이 되지 않은 번은 윤기는 없지만 따뜻하고 부드럽다. 한입 가득 베어 물자 입가에 녹색 시금치 소스가 가득 묻어난다. 검지와 약지로 양 입가의 소스를 닦아내어 그대로 입안으로 가져간다. 부드러운 치즈와 크림의 맛이 난다. 시금치의 향은 강하지 않아서 오히려 좋다. 패티에서 나는 짠맛을 시금치 소스가 확 잡아주는 느낌이다.


볶은 시금치는 의외다. 그래도 채소의 떫은맛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다. 줄기에서 느껴지는 질긴 식감은 있지만 볶은 채소의 기름지고 고소한 맛이다. 머릿속에 양파를 포기하고 시금치를 넣을 만 한가라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지만 패티의 육즙과 함께 금방 삼켜졌다. 맛있다. 이번엔 두껍게 튀겨진 감자칩을 집었다. 보통 굵게 튀기면 목이 마른 맛이 난다. 감자에는 수분이 하나도 없는 식물이니까. 그런데 무슨 일인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 훌륭하다. 이 정도면 맥도널드 후렌치 프라이의 라지 버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고개를 드니 햇빛이 부서지는 바다에 눈이 부시다. 보통 버거 하나를 먹는데 5분을 넘기지 않지만, 무거버거에서는 평소의 몇 배나 오래 걸렸다. 바다 한 모금, 버거 한 모금. 메뉴판에 맥주가 왜 있었는지 이해가 된다.(그것도 하와이에서만 생산되는 코나 맥주만 있다.)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틀림없이 맥주를 시켰을 거다. 발견되기 힘든 곳에 가게를 내고 잘 알려지지 않은 코나 맥주를 파는 건, 사장님의 철저한 계획일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절대 나처럼 성질이 급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여기저기 인테리어가 덜 끝난 느낌이 드는 것도 나름대로 조금씩 발전해 가는 중이 아닐까.


다음 해인 2018년에 갔을 때는 당근 버거와 코나 맥주를 주문했다. 당근 버거에는 라면땅처럼 얇게 튀겨진 당근 튀김이 들어가 있었는데, 시금치 버거와 다르게 토마토, 양상추 같은 생야채가 들어있다. 너무 드라이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아이디어일 것이다. 건물에도 변화가 생겼다. 2층이 확장된 베란다 구조로 바뀌면서 야외석이 사라졌다. 대신 통창을 활짝 열어서 2층 어디에서도 정면이 바다가 보였다. 좌석은 높이가 제법 높은 스탠드 계단으로 바뀌었는데 어떻게든 앞사람이 바다를 가리지 않는다. 여러모로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모두의 바다가 아닌 고요한 나의 바다를.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는 해마다 무거 버거를 방문했고, 매년 조금씩 뭔가 하나씩 더 생겨났다. 그러다 2년 만에 재방문한 2021년에는 1층의 야외석 마저 사라지고, 건물이 통째로 검은색 직육면체로 환골탈태했다. 상호는 MGBG로 바뀌었고, 버거집이라기보다는 현대 미술관 같다고 할까. 여러모로 시골 바닷가의 작은 노점상이 이제는 어엿한 대기업이 되었다. 돌담 너머 바닷바람을 느끼면서 버거에 맥주를 곁들이던 낭만은 사라졌지만, 이제는 1년 사계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통창으로 펼쳐진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다.(그래서인지 메뉴에서 맥주도 사라졌다)


5년 동안 바뀌지 않은 것들도 있다. 건물을 둘러싼 낮은 돌담, 단 세 개뿐인 버거 메뉴, 버거와 감자칩의 촉촉함. 저 낮은 돌담에서 시작해서 지금의 MGBG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낙원에서의 삶이라는 풀기 어려운 골칫거리를 이렇게 잘 풀어낸 그가 새삼 존경스럽다. 천천히 그렇지만 고집스럽게, 앞으로도 계속 이 자리를 지켜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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