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편
긴 일기의 시작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은 버거인 맥도날드로 해보려고 한다. 서두에 말했듯이 '버거 뭐 좋아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망설임 없이 맥도날드라고 대답한다. 대충 짧게 잡아도 25년 정도의 인연인데, 한 브랜드를 이토록 오랫동안 고집스럽게 이용하기란 쉽지 않다.(아이폰과 갤럭시 핸드폰이 나온 지 25년이 안되었으니)
오차 범위를 넓게 잡아 평균 주 2회, 직장생활 10년으로 계산해보니 꽤 놀라운 숫자가 나온다. 나는 지난 10년간 맥도날드 버거를 약 천 개 먹었다. 거기에 해외에서 방문한 맥도날드와(여행하면 그 나라의 맥도날드는 꼭 가본다) 기억이 닿지 않는 학창 시절까지 합하면 사실 천 개는 가볍게 넘으리라. 영화 <인디에어>에 보면 주인공이 항공사 마일리지 천만을 모아 비행기 기장으로부터 직접 최고등급인 플래티넘 카드와 축하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맥도날드에 마일리지 제도가 있었다면(2천 년대 초반에 잠깐 있었다) 나 역시 그 정도 대접은 받지 않았을까.
맥도날드를 처음 간 건 90년대 중반,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명절에 내려온 사촌 형과 부산 서면에 나갔다가 그 화려한 간판에 이끌려 들어갔다. 노랗고 빨간 간판과 기괴한 피에로에 시선을 빼앗겼을 뿐 우리 둘 다 버거가 뭔지 몰랐다. 결국 유일하게 아는 단어가 들어간 '치킨세트'를 주문했다. 형은 치킨 가격치고는 너무 싼 게 이상했던지(기억으론 2,500원 정도였다) 세트를 네 개나 주문했는데, 나중에 음식을 받으러 갔을 때는 치킨 대신 감자가 트레이에 넘치도록 담겨 나와 깜짝 놀랐다. 거기다 치킨은 대체 왜 빵 사이에 껴놨으며, 달달한 양념은 어디 가고 웬 마요네즈를 발라놓은 건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분명 괴상한 음식이었지만 감자칩이 맘에 들었던 건지, 그 강렬한 로고를 기억에서 떨칠 수 없었던 것인지, 명절이 끝나고 맥도날드에 다시 갔다. 이번엔 제대로 패티가 들어간 버거를 먹었고, 그것이 버거 사랑의 시작인 셈이다.
오늘날의 패스트푸드 시스템의 창시자라고도 볼 수 있는 맥도날드의 창립자는 미국의 맥도날드 형제다. 영화 <파운더>에 이들의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핫도그 장사에서 시작해 버거 가게를 오픈한 형제는 대량생산에 적합한 주방 시스템을 고안하는데, 그게 바로 버거, 감자튀김, 음료를 한 세트로 파는 이른바 "패스트푸드" 시스템이다. 이 식당이 빠른 회전율로 대박을 치자 레이 크룩이란 사업가가 형제에게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하고, 미국 일리노이주에 바로 오늘날의 맥도날드가 탄생한다. 그리 오래지 않아 맥도날드는 전 세계에 없는 곳이 없는, 코카콜라와 더불어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브랜드가 되었다. 스타벅스가 있기 전에 맥도날드가 있었다고나 할까.
언젠가 시애틀의 스타벅스 1호점에 간 적이 있다. 비가 오는 겨울밤이었는데도 좌석도 없는 테이크아웃 전용 매장 안에 움직이면 등과 등이 맞닿을 만큼 사람이 많았다. 보자마자 "안녕하세요. 반가워요"라고 정확한 발음으로 인사하는 직원들 덕분에 매장 내에 머무는 짧은 시간 동안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 맥도날드의 1호점은 1955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오픈했지만, 안타깝게도 폐점한 지 오래다. 하지만 건물은 남아있다. 가끔 '언젠가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어 올릴 때 무슨 태그를 달까' 같은 고민을 하기도 한다. 물론 한 손에는 지금도 맥도날드에서 팔고 있는 '1955 버거'를 들고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맥도날드가 특별히 맛있어서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정상적인 식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맥도날드가 맛있게 느껴지는 건 20대까지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버거를 먹어봤지만 맥도날드의 버거는 맛있다기 보단 기준점에 가깝다.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먹을만한 버거다'라는 기준점. 한식으로 치면 김밥나라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런 맥도날드에도 전성기라는 게 있었다.
2015년 여름, 강남역 12번 출구 앞에 있는 맥도날드에 '시그니처 버거'라는 이름으로 메뉴 3개가 추가됐다. 세트 가격이 만원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논란이 많았지만 맛은 훌륭했다. 초기에는 플라스틱 판이 아니라 나무 트레이 위에 제대로 된 나이프와 포크가 같이 올려져 나왔고, 심지어 주문이 끝나면 자리로 가져다주기까지 했다. 당시 나의 최애 메뉴는 골든에그 치즈버거. 버터를 머금어 윤기가 흐르는 브리오슈 번에 계란 프라이, 베이컨, 양파가 들어가 꽤 두툼하고 맛있었다.
안타깝게도 전성기가 오래가진 않았다.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가져다주는 서비스가 사라졌고, 식기도 1회용 플라스틱으로 바뀌었다. 어느 날 슬그머니 나무 트레이가 사라지더니 결국엔 시그니처 버거 메뉴 자체가 사라졌다. 하루에 수백 명이 방문하는 매장에서 그 퀄리티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그때부터가 맥도날드 추락의 시작이었다. 런치메뉴가 사라지고(이 책을 쓰는 도중, 갑자기 부활했다!), 부드럽게 씹히던 번은 말라서 아무런 식감도 느껴지지 않는 그냥 그런 빵으로 바뀌었으며, 패티는 더 이상 마르기 힘들 정도로 말라서 축 늘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맥도날드에 간다. 현재 나의 최애는 베.토.디 버거다. 베이컨 토마토 디럭스. 키오스크가 없던 시절에는 "뭘로 하시겠어요?"라는 질문에 "베토디요"라고 대답해서 직원을 당황시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름 그대로 베이컨과 토마토가 들어간 버거인데, 칠리소스와 마요네즈를 섞은 특유의 소스가 아주 맛있다. 패스트푸드 특유의, 건강에 나쁠 거 같은데 끊기 힘든 맛의 집합체라고나 할까. 2순위는 1955 버거고, 아주 가끔 고기가 당길 때는 더블 불고기 버거를 먹기도 한다.
요즘은 버거 선택의 폭이 넓다. 맥도날드가 만들어놓은 시스템을 습득한 롯데리아, 버거킹, kfc, 맘스터치가 전국 어디에나 있고, 최근에는 노브랜드 버거와 이삭 버거도 등장했다. 이들의 성공과 함께 유행처럼 늘어난 이른바 '수제 버거'까지 합하면 단일 메뉴로는 치킨과 삼겹살 다음으로 브랜드가 많은 식당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주말 아침에도, 맥도날드 신사점의 에그 맥머핀과 커피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해피밀 메뉴 변경의 날이었는지 한 직원이 매장 한편에 있던 해피밀 장난감 상자를 들어내고 다른 상자들로 교체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1955년에 미국 맥도날드 1호점이 생기고 67년이 흐른 오늘 아침에도 맥도날드의 주방은 여전히 바쁘다.
누가 뭐래도 맥도날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보편화된 버거다. 영국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 지에선 빅맥 지수로 각 나라의 구매력 평가를 비교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 맥도날드가 책이나 인터넷에서만 볼 수 있는 박제된 역사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맛있는 음식이 필요하듯이 편안한 음식도 필요한 법이다. 어렸을 때 내가 했던 경험을 늙어서, 혹은 언젠가 나의 2세와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소소한 행복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