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대체로 가리는 음식이 없고, 못 먹는 것도 없지만,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는 질문에는 몇십 년째 버거라고 대답하고 있다. 주로 무슨 버거를 먹냐는 질문이 이어질 때도 대답은 늘 같다. 맥도날드. '주로'를 숫자로 표현하자면, 평균적으로 주 2회, 월 10회 정도 되겠다. 10년째 원룸 생활을 하고 있지만, 집을 구할 때는 항상 맥세권(맥도날드가 도보거리에 있는 동네)을 고수한다.
이쯤에서 뒤로가기를 누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버거 요정이라는 사람이 겨우 주 2회? 진정하고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맥도날드만 따지면 그렇다는 것이고, 대상을 '버거'로 바꾸면 주 5회, 월 20회 정도로 올라간다. 재택근무가 일상화된 요즘은 주 6회로 늘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속으로 버거를 먹은 기록은 최대 10일이다. 대학원생 때의 일이다. 공대 대학원이었는데, 연구실의 막내가 점심 메뉴를 알아서 잘 고르고 미리 준비하는 관습이 있었다. 박사들의 엉덩이가 무거운 날이면 직접 사 와야 했다. 신입생이던 나는 그게 일종의 특권처럼 느껴졌고, 매일 부산대학교 정문에 있는 맥도날드를 사 왔다. 5일 정도 되었을 때 박사 한 명이 호통을 쳤다.
"저 새끼 대체 뭐야"
그리곤 나를 왕따 시킨답시고 점심시간에 혼자 버거를 먹게 했는데,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학원생들은 주로 밑반찬이 10개 정도 깔리고 공깃밥이 넘치도록 나오는 가정식 백반집을 자주 갔다. 부산대학교 후문에는 그런 가게들이 수두룩 빽빽했는데, 이름은 보통 "미영이네" 라던가 "옥이네" 같은 이름이다. 그런데 새로 입학한 신입 석사 한 명 때문에 며칠 연속으로 버거만 먹고 있으니 그 심정도 이해는 간다.
그 때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나의 식사 패턴은 바뀌지 않았다. 이렇게 산 지가 어느덧 인생의 절반 정도 되었으니, 어쩌면 지금쯤은 쌀밥을 제쳤을지도 모르겠다. 몇 해전 카드 소비 패턴을 분석해주는 앱이 인기를 끌 때는 항상 지난달의 지출 랭킹 상위 가맹점이 맥도날드였다. 그래서 그런지 직장 동료도, 친구들도, 내 동생도 나를 보면 버거를 먹으러 가야 될 거 같다고 한다.
버거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의외로 빵과 고기, 야채가 모두 들어간 완전식품이다. 맛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 물리지 않는다. 그리고 효율적이다. 만드는 것도 공장화 되어 있어 빠르고, 먹는 것도 빠르다. 버거 세트에서 버거만 먹는 시간은 대게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말 그대로 끼니를 때우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어, 특히 갈길 바쁜 여행지에서 최고의 효율을 자랑한다. 요즘 같은 거리두기 사회에는 더욱 최적화된 음식이다. 아직도 1인 식사가 어색한 한국사회에서 버거집만은 혼자 먹기에 전혀 어색하지 않다.
배달음식에서도 버거만큼 간편한 게 없다. 된장찌개를 먹는다고 해보자. 보통 두부만 해도 반모는 남는다. 잘개 볶아진 파 같은 야채도 뚝배기 바닥에 군데군데 남기 마련이다. 버거는 두부를 반 모나 썩혀서 음식물 쓰레기로 만들면 악몽을 꿀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조류독감이 돌아도, 채소값이 폭등을 해도, 버거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한마디로 죽을 때까지 부담 없이 매일매일 먹을 수 있다. 이런 얘기를 태연하게 하는 나를 언젠가부터 주변에서 버거 요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값을 하기 위해 버거 가게가 보이면 들어가서 먹어 보고, 구글 지도에 사진과 함께 짧은 감상을 써서 저장하곤 했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2010년만 해도 버거는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된 식사 취급을 못 받던 음식이었다. 빵, 샌드위치, 떡볶이처럼 정규 식사에 편성되지 못했고, 그 와중에 카페나 분식에도 끼지 못하는 외톨이였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주로 해외여행을 가서 구글맵에 핀을 꽂았다. 최근 10년간 음식 방송이 많아지면서 수제 버거란 말이 유행처럼 퍼졌고, 버거에 진심인 가게들이 엄청나게 늘었다. 서울에서 핫하다는 버거집은 거의 대부분 가봤고, 지금도 새로 오픈한 곳은 무조건 가는 편이다.
다만 이 글은 버거 맛 집을 소개하거나 맛을 평가하는 목적으로 쓰진 않았다. 단순히 버거 요정으로 살아온 그 오랜 기간 중에 특별한 추억이 있는 버거, 가게, 사람들을 기억에서 끄집어내어 썼다. 버거의 맛에 대한 표현과 그림은 과거의 내가 작성했던 버거 일기를 참고했으며, 최대한 그 가게를 처음 방문했던 때를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 그 외의 대부분은 버거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의 소소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주로 혼자 점심을 먹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라고나 할까. 책에 등장하는 가게들은 단순히 내가 방문한 순서이며, 편의를 위해 국내와 해외로 분리했다.
그럼에도 나의 최애 음식 버거를 다른 사람들도 더 사랑했으면 좋겠다. 새로운 버거집에 들어설 때면 어떤 메뉴판을 받게 될까 두근두근 거리는 그런 마음을 더 많은 사람들이 느꼈으면 좋겠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맵지도 달지도 않은 버거의 매력이 당신에게도 전해지면 좋겠다. 삶을 더 평화롭고 유쾌하게 만드는, 작고 평범한 기쁨을 알아갔으면 좋겠다.
아, 요정이라는 호칭에 대한 불만 접수를 많이 받는다. 변명을 하자면 요정이 팅커벨만 있는 게 아니다. 안데르센 동화만 해도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요정이 나온다. 애초에 요정은 나이가 많다. 그러니 오해는 마시라. 버거 요괴라고 하면 어감이 이상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