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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Sep 13. 2022

노스트레스 버거

국내편

제주도에서 살아보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나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됐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내가 어떤 것에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정확히 알게 됐다. 우선 나는 엘리베이터를 싫어한다. 판교에서는 점심을 먹고 오면 항상 수십 미터에 달하는 엘리베이터 줄과 마주친다. 조금 전까지 바깥에서 즐겁게 웃으며 떠들던 사람들도 그 줄 끝에 서는 순간 입을 다문다. “쏘오옥, 쏘오옥”하고 빨대가 음료를 빨아들이는 소음만이 불규칙하게 반복될 뿐. 


대화가 끊기자 머릿속에는 오전에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 떠오른다. 아, 내가 그 코드를 이렇게 짰었지. 잘못한 거 같은데. 어떻게 바꿔야 할까. 시계를 보면 아직 점심시간이 20분 정도 남았다. 그렇지만 예열되지 않은 뇌가 제멋대로 풀가동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코드를 연다. 바깥에 바람이 부는지, 비가 오는지 같은 정보에 무감각해진다. 매일매일 반복되던 그 순간이 스트레스였음을 모른 채 수년간 직장생활을 해온 거다.


2층 건물에 한 층이 엄청 넓은 제주 오피스에서의 생활은 전혀 달랐다. 기숙사는 오피스에서 도보거리에 있고, 역시 엘리베이터가 없는 2층 건물이다. 모든 게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는 높이에 있고, 시야의 나머지 부분은 푸른 나무와 파란 하늘이 차지한다. 점심때 나누던 농담이 사무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끝나지 않는다. 각자 자기 자리에 앉아 서랍에서 칫솔을 꺼내는 와중에도 웃기 바쁘다. 창문을 열고 미풍을 느낄 때면 웃음소리가 같이 실려온다. 그러면 내 입가에도 같이 미소가 번진다. 그것으로 부족하면, 10미터 앞에 있는 출입구를 빠져나가 시선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일광욕을 즐긴다. 일과 삶의 경계가 약간 느슨해졌고, 동료라기보다는 지인에 가까워졌다. 


그 후론 전셋집을 구할 때 마지노선을 3층으로 정했다. 3층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도 나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빨리 나갈 수 있는 maximum 거리다. 엘리베이터는 사실 이동을 쉽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라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게 만드는 발명품이다. 엘리베이터만 타면 굳이 생각해봐야 도움이 안 되는 것들만 떠오르는 것도 그 이유이지 않을까. 한 때는 나도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너무 잘 이해한다. 대부분 일과 삶의 경계가 느슨해진 사람들이다. 결국은 그 모든 게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줄이는 건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 직장인이라면 자고로 자기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필요한 법이다. 30대 초반에는 주로 운동을 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운동과는 멀어졌고, 이제는 게임을 하거나 카페에 가서 글을 쓰거나 읽는다. 카페는 가급적 집에서 조금 먼 곳으로 정한다. 햇빛이 있는 곳에서 걷다 보면 생각이 달라지고 기분이 바뀌는 걸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겐 집 밖으로 빨리 나갈 수 있는 환경이 더더욱 중요하다. 


의외로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저기압일 때는 고기 앞으로 라고 누가 그랬던가. 어떤 느낌일지는 알 것 같지만 나는 조금 다르다. 나는 버거를 아무 생각이 없을 때, 혹은 기쁠 때 주로 먹는다.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버거를 먹지 않았다. 카드 명세서가 날아왔을 때 지난달에 버거를 먹는 날이 많았다는 건 그만큼 별 일 없이 잘 지냈다는 의미다. 만약 내가 버거집을 차린다면 이름을 “노스트레스 버거”로 해야겠다는 상상을 늘 해왔다. 그런데 실제로 같은 이름의 버거집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란.


노스트레스 버거를 처음 방문했을 때는 여름이었다. 바쁜 점심시간을 피해 최대한 일찍 도착하려고 노력했지만 녹사평역에서 부터 걸어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이제는 빈 점포가 더 많은 경리단길을 지나쳐서도 한참을 더 북상한다. 마지막 오름 막길이 시작할 때쯤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름과는 다르게 찾아가는 길이 스트레스다. 중턱쯤에 올랐을 때 좁은 인도와 도로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사람들이 네댓 명 보인다. 시계는 11시 반. 코로나도 여름의 더위도 새로운 버거 스타의 탄생을 막지는 못하는 것 같다.


겉으로 본 가게의 느낌은 뭐랄까. 외국 같다. 좋은 의미라기보다는 뉴저지의 어느 아케이드 상점가 코너에 있을 법한 간이 피자집 느낌이랄까. 테이블 3개에 그마저도 간이의자 정도가 있는 좁은 매장이다. 입구 위에 달린 tv에서는 보기만 해도 땀이 나는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나오는 레슬링 경기가 한창이다. 연기로 샤워를 하며 패티를 굽고 있는 직원들의 팔과 목에는 저마다 문신이 가득하다. 어쨌거나 이태원 답다고 해야 할까. 

다들 고생을 했는지 기다리던 사람들의 등에 달라붙은 티셔츠의 색깔이 땀에 변색되기 시작한다. 다행히 메뉴가 Classic Cheese Burger 하나뿐이기 때문에 주문은 빠르게 진행됐다. 패티와 치즈를 몇 장 넣느냐에 따라 가격만 달라진다.


척추 위로 흐르는 땀방울을 느끼면서 패티가 한 장만 들어간 기본 치즈버거를 주문했다. 버거는 편의점에서 파는 1회용 접시 위에 올려져 나온다. 할라피뇨 고추가 하나 올라가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번은 윤기가 없고, 갈색 겉면이 갈라여 하얀 속살이 얼핏 얼핏 보였고, 얇게 구워진 패티가 번 바깥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옆에서 보면 진짜로 고기와 치즈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과연 무더위에 언덕을 오르던 스트레스가 해소될까 라는 생각과 함께 버거를 양손에 집어 들었다. 그대로 크게 한입을 베어 물자마자 급히 버거를 내려놓고 말았다. 겨우 한입을 베긴 했지만 이에 닿은 패티가 너무 뜨겁다. 자세히 보니 패티를 구웠다기보다 거의 튀긴 느낌에 가깝다. 기름판에서 구워지는 호떡처럼 뭔가로 납작하게 눌러서 튀기듯이 구워져 대단히 뜨겁다. 치즈는 처음부터 고기 안에 들어있었던 것 마냥 더 붙을 수 없을 정도로 패티에 찰싹 스며들었다. 할 수 없이 애플 로고 같아진 버거를 잠시 올려놓고 멍하니 레슬링 화면으로 시선을 옮긴다. 


두 번째 시도 때는 좀 더 안쪽을 베어 물었다. 음. 짭조름한 소고기의 맛. 거의 후라이드 치킨에서 느낄 수 있는 염도의 패티다. 조금 짜다 싶을 즈음에 양파와 피클의 상큼한 맛이 침샘을 자극한다. 첫맛도 자극적이고 끝 맛도 자극적이다. 탄산을 부르는 맛. 


두툼하게 얼기설기 엮긴 고기 덩어리 사이로 육즙이 팡팡 도는 패티와는 전혀 다른 매력이지만 기름기는 뒤지지 않는다. 건조하고 윤기가 없던 빵이 절반쯤 먹었을 때에는 어느새 반들반들 해졌다. 마지막에는 패티와 빵이 거의 하나가 된 듯 고깃기름에 버무려져 마치 우유에 적신 카스테라 같은 식감이 된다. 볼륨 없이 푹 꺼져있던 번은 빈틈없이 계획된 것이 분명하다. 다 먹고 나니 소스가 전혀 없었는데도 양손이 기름으로 번들거린다. 그제야 계산대에 비치된 1회용 비닐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노란 패키지에 담겨 있는 감자칩 하나를 먹어본다. 이것도 영락없는 맥주 안주다. 감자의 식감보다는 튀김의 식감, 그리고 짠맛. 입안에서는 계속 침이 줄줄 흐른다. 버거를 먹기 시작해서 감자칩까지 완전히 식사를 마치기까지 쉬지 않고 침이 고인다. 순간 깨달음이 왔다. 아. 사장님은 다 계획이 있구나.


보통 치즈버거는 야채가 아예 없기 때문에 목이 메는 맛이 나기 마련이다. 치즈버거를 주문한 손님에게 "야채가 안 들어가는데 괜찮으세요?"라고 물어보는 가게도 많다. 나 역시 치즈버거는 잘 먹지 않았다. 수천번 방문한 맥도날드에서도 쿼터파운더(맥도날드의 치즈버거다)를 먹은 기억은 손에 꼽힌다. 하지마 노스트레스 버거에서 치즈버거의 본질을 깨달았다. 재료에서 나오는 수분이 아니라 침샘을 자극해 수분을 만든다. 이제보니 노스트레스라는 이름이 너무 찰떡이다.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 무너트릴 만한 확실한 자극이 있다. 아이언맨이 왜 그렇게 치즈버거만 먹어댔는지 이해가 간다. 오죽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이 아니던가.


지금도 짜증 나는 일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노스트레스 버거를 먹는다.(물론 아닐 때도 먹는다) 뜨거운 패티에 혀를 한번 데인 후, 이어지는 자극에 빠져들면 어느새 짜증으로부터 한 걸음 멀어진 느낌이 든다. 배달을 시켜도 비닐장갑이 같이 오는데 한 번도 쓴 적은 없다. 조금씩 기름기를 먹어가는 빵의 촉감이 나쁘지 않다. 패티는 총 3장까지 넣을 수 있는데, 다행히 지금까지는 더블 버거 선에서 해결이 가능했다.


언젠가는 트리플 버거를 주문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어떤 스트레스 일지 상상이 안 가지만 뭐 어떤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한 가지 더 늘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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