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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Sep 15. 2022

다운타우너

국내편

2000년대 중반에 워킹홀리데이로 1년간 호주에서 지낸 적이 있다. 21세기가 열렸으니, 외국에서도 한번 살아봐야 되지 않나 싶었다. 해외여행도,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도 처음이고, 영어로 대화를 해본 적도, 외국인과 만나본 적도 없었지만 호기롭게 현금 100만 원을 들고 시드니로 떠났다.


호주 생활은 당연히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비자 이름부터가 '워킹홀리데이'다. Working을 해야 Holiday 가 있는 삶이다. 낯선 나라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사는 삶이다. 호주에서 선택할 수 있는 노동자의 삶은 크게 두 가지다. 높은 월세를 견디며 도시에 머물면서 식당이나 건물 청소 같은 일을 하거나, 아무도 모르는 이름의 시골에 처박혀 농장 노동자로 일하거나. 주로 남자들이 후자를 택했고, 나 역시 그랬다. 그렇게 선택한 첫 번째 정착지는 번다버그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호주의 동부 해안선을 따라 시드니에서 무려 1300km 나 떨어진 외딴곳이었는데, 각종 야채와 과일 농장이 많았다.

  
호주의 농장 시스템은 심플하다. 백팩커스(Bagpackers, 백팩을 메고 다니는 사람들이 묵는 숙소라고 해서 붙여진 명칭)라고 불리는 마을 내의 호스텔에서 일주일치 숙박비를 계산하면, 일을 할 수 있는 농장을 연결해줬다. 농장으로 출퇴근하는 차량도 운영하고 주급도 농장이 아니라 호스텔에서 받으니, 단순히 숙소가 아니라 일종의 인력시장 에이전시를 겸하는 셈이다.


농장 노동자의 하루는 더 심플하다. 새벽 네시 반에 일어나서 로비에 있는 배차 표를 확인하고, 다섯 시에 농장으로 가는 차에 탄다. 정확히 8시간 동안 채소나 과일을 따서 트레일러로 옮기는 일을 반복하고, 정확히 2시에 귀가하는 차에 타면 하루 일과가 끝난다. 그렇게 하루 8시간을 일하면 보통 100달러를 벌었고, 일주일 숙박비가 120달러 정도였으니 나쁘지 않아 보인다. 농장일이 얼마나 고된지를 제외하면 말이다.


백팩커스의 하이라이트는 저녁시간이다. 사람들은 주방에 모여 각자 그날 자기가 따온 식재료를 전시하듯 꺼낸다. 그 자리에서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최고 인기는 파인애플 같은 과일이지만, 의외로 주키니(호주의 호박)나 캡시쿰(호주의 피망) 같은 요리에 필수로 들어가는 야채도 인기가 많다. 아보카도를 처음 본 것도 그때였다. 까맣고 투박한 겉모양과 달리 칼집을 넣어 세로로 자르면 물기 없는 멜론 같은 부드러운 단면이 나온다. 부드럽고 달콤한 과육의 맛을 상상하며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었다.


"윽."


정확히 그 소리가 났다. 이는 다문채로 입술을 양쪽으로 벌리고 눈가를 찌푸리면 나는 소리. 고되게 일하고 온 노동자의 땀방울을 생각해 차마 눈앞에서 뱉지는 못했지만 정말 맛이 없었다. 미끌거리면서 뭉개지는 것이 영락없는 버터의 질감이지만 이에 부딪히는 생경한 식감, 씹을 때마다 퍼지는 쌉싸래한 맛, 삼킨 뒤에도 입안에 남는 무언가 텁텁함. 아무리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맛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소가 아니고 과일이란다. 하긴 생긴 게 열매같이 생기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먹을 이유가 없다. 호주에는 애플망고, 파인애플, 만다린, 베리 같은 제철 과일이 넘쳐난다. 첫인상부터 그 모양이었으니 그 후론 아무리 많은 아보카도가 주방에 쌓여있어도 손도 대지 않았다.


다시 시드니로 돌아왔을 때, 호주 식당에서는 아보카도가 정말 많이 쓰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샌드위치, 파스타, 스시, 볶음밥, 심지어 스테이크를 시켜도 아보카도가 같이 나오곤 했다. 그런 음식은 보통 메뉴 이름에 'Aussie'나 'Austrailian'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데, 원치 않게 아보카도가 들어간 음식이 나오면 한두 점 정도 먹다가 남기곤 했다.


다시 아보카도를 만난 건 그로부터 10년 뒤, 멕시코에서다. 멕시코에선 어느 식당을 가도 최소 두 가지 이상의 살사(소스의 스페인어)가 나오는데, 가장 대중적인 것은 과카몰리가 아닐까 싶다. 그냥 보면 온통 녹색인 것이 마치 익지도 않은 바나나 껍질을 잘게 으깨 놓은 것 같이 생겼는데 사실 주원료는 아보카도다. 


하지만 맛있다. 나초를 과카몰리에 최대한 푹 찍어 먹으면 치아 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토마토의 달고 신 채소 맛, 양파의 촉촉하고 알싸한 맛, 라임의 상큼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마무리로 입술에 묻은 나초의 소금기를 슬쩍 혀로 핥고 나면 알싸하고, 달고, 시고, 짭짤한 맛에 절로 맥주에 손이 간다. 


처음엔 그 녹색의 정체가 아보카도라는 것을 몰랐다. 호주에서의 첫인상 이후로 아보카도는 나에게 음식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과달라하라의 어느 로컬 식당에서 주문한 토르타에 토마토와 생 아보카도가 같이 나오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생으로 먹으면 생소한 식감에 아무런 맛도 안나는 아보카도가 레몬과 소금을 만나면 그야말로 최고의 살사로 변하는 것이다.


멕시코를 떠나면서 아보카도와의 인연은 다시 끊겼다. 가끔 멕시코 음식점에 가서나 맛볼 뿐, 한국에서의 아보카도는 백화점 수입 식료품 코너에서 판매하는 수세미 색깔의 정체불명 물체에 불과했다. 그런 아보카도를 버거 속 재료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2017년, 한남동에 있는 ‘다운타우너’라는 버거 가게가 인스타그램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수제버거를 다룬 인터넷 기사에는 빠짐없이 나왔고, 그  해 언젠가 수요미식회에 등장했다. ‘풍미’와 ‘아보카도’라는 말이 계속해서 반복됐는데, “이래도 안 먹을 거야? 이래도? 이래도?”처럼 들렸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아니 아보카도의 풍미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인가 궁금했다.


이미 웨이팅이 길기로 소문이 나있었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토요일을 피해 일요일 오픈 시간에 맞춰 갔지만, 족히 봐도 30명은 넘는 대기줄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결국 그날은 포기하고 그다음 주에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오픈 30분 전에 도착했지만, 그래도 네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남동 대로변도 아니고 좁은 뒷골목, 당시만 해도 아직 주택가라 줄을 어디로 서야 될지도 모를 그 좁은 길목에서 아보카도를 먹기 위해 줄을 서다니. 기대 반 걱정 반이던 마음이 내 뒤로 선 사람이 늘어날수록 기대로 채워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버거라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11시 반. 종업원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입장이 시작됐다. 입구에 메뉴판이 놓여있긴 했지만 볼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아보카도 버거다. 시그니처 메뉴인 듯한데 메뉴에서 5번이라는 게 의외다. 최근 생겨나는 수제버거 가게답게 세트메뉴는 없고 감자와 콜라를 따로 판다. 콜라는 2500원. 편의점의 두배지만 그런 걸 따질 때는 아니다.


좁은 골목과 달리 가게 안은 현대적이고 상쾌하다. 오픈된 주방 너머로 부채꼴로 잔뜩 쌓인 아보카도가 보였고, 한쪽에선 철판이 한창 가열 중이다. 버거가 나오기까지는 20분 정도가 걸렸는데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다. 부채꼴 모양으로 잔뜩 쌓아 올린 아보카도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이 정도면 아보카도가 들어간 정도가 아니라 범벅이다.


맛은 과연 어떨까. 버거가 속지와 겉포장, 2중으로 포장되어 있으니 공략 가능한 곳은 한 군데뿐이다. 거기엔 아보카도가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다. 초록색 아보카도와 빨간색 토마토의 대비가 멋지다는 생각과 함께 버거를 입으로 가져간다. 


제일 먼저 느껴지는 건 후추의 냄새. 입에 씹히는 건 아보카도와 빵과, 로메인과 토마토, 그리고 뜨거운 패티. 후추의 알싸한 맛과 패티의 짠맛을 기대했지만 무언가 다른 종류의 기름기가 입안 가득 느껴진다. 치즈? 버터? 마요네즈? 아니다. 치즈는 패티 속으로 녹아들어 잘 보이지도 않고 버터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뭘까? 입안을 가득 채운 이 풍미는. 


뭘 발랐는지 윤기가 반들반들한 아보카도와 베이컨과 패티가 섞이면서 마치 버터가 잔뜩 들어간 슈크림빵을 먹는 착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달지도, 느끼하지도 않다. 아보카도는 그 자체로는 여전히 아무런 맛이 없고, 패티도, 양파도, 치즈도, 베이컨도, 그 어떤 재료도 맛이 튀지 않는다. 마치 여러 재료를 하나로 합쳐놓은 것 같다고 할까. 삼키고 나면 혀 끝에 느껴지는 후추의 알싸한 맛과 무언가 입안 가득 있었던 것 같은 기름진 풍미만 남는다. 


버거가 절반 정도 남았을 즈음에는 겉포장지에서 버거를 꺼내 먹어야했다. 그즈음 아보카도는 이미 사라졌고, 번은 패티의 기름을 가득 먹어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제야 기름진 고기 맛이 올라왔다. 치즈에 버무려진 마지막 남은 한 덩어리를 입안에 넣는다. 음식이 나오기까지 20분이 걸렸는데 먹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 어떤 맛이냐고 지금 묻는다면 ‘풍미’와 ‘아보카도’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 외엔 무슨 맛이라고 특정하기가 힘들다. 그러고 보니 콜라는 따지도 않았다. 그만큼 버거가 촉촉했다는 증거다.


한번 맛을 본 뒤로는 부채꼴로 펼쳐진 아보카도를 보면 입맛이 돌았다. 이제 보니 비주얼 깡패다. 마치 파릇파릇한 새싹이 더 이상 버거는 정크푸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버거를 서있게 만들어 주는 겉포장도 신선하다. 보통은 접시 위에 얌전히 놓여 있지 않나. 블랙 앤 화이트가 교차하는 스트라이프 속지도 멋스럽다. 내 기억으론 다운타우너 이후로 버거를 종이컵 같은 박스에 담아 세워서 주는 가게들이 늘어났다. 다운타우너는 버거의 새로운 맛뿐만 아니라 버거를 먹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셈이다. 


다우 타우너는 지금도 건재하다. 유명세는 시들 줄을 모르고, 좁디좁은 골목에서 벗어나 아래위 2층에, 테라스가 있는 멋들어진 전용 건물로 옮겼다. 지점도 하나씩 늘어 최근에는 제주도에도 생겼는데, 제주한정 크랩버거를 판다. 아직 먹어보진 않았지만 다운타우너의 시도라면 한번 믿어볼 만하다. 지난 몇 년 동안 다운타우너에서 다른 메뉴를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때가 된 셈이다.


처음 방문한 이후로 5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아보카도를 먹지 않는다. 아보카도가 들어간 다른 음식이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하지만 아보카도 버거는 맛있다. 무슨 맛이냐고? 자주 먹어서 익숙해지고 싶은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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