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노약자석에서 트로트 음악이 들려올 때가 있다. 그 노래를 크게 틀어 놓은 노인은 어쩌면 '내가 이 노래를 듣고 좋은 것처럼 남들도 좋아할 거야' 라거나 '이 정도 소음은 괜찮겠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혹은 회식 자리에서 술을 권하는 부장님은 ‘나는 권유받는 게 기분 좋으니, 너에게도 권하겠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겉보기에는 나름의 배려와 도움의 마음으로 보일 수 있지만, 타인에게는 불쾌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에게 좋은 것이 항상 남에게도 좋은가?’라는 질문이다. 나의 기준으로 대접하는 호의가 상대방 입장에서 맘에 안 들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해석하고 조정하기 위해 동서양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골든 룰(Golden Rule)’이라는 원칙을 사용해 왔다. 이 원칙은 동서양 모두 핵심적인 도덕 기준으로 자리해 왔으며,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구절로 대표된다. 하지만 이 원칙은 문화권에 따라 전혀 다른 맥락으로 해석된다.
서양에서의 골든 룰은 신약 성경, 특히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구절로 표현된다. 이는 자신의 수요나 니즈를 바탕으로 타인을 대하라는 적극적이면서 '하라'라는 긍정형의 윤리 규범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잘못 적용될 소지가 있다. 앞서의 예시들처럼 ‘내가 괜찮으니 너도 괜찮겠지’라는 식의 접근이 그렇다.
이에 반해, 동양의 유교적 골든 룰은 보다 조심스러운 접근을 제시한다. 유교에서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 말하며,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태도를 강조했다. 서양의 태도와 반대로 소극적이면서 '하지 말라' 라는 부정형의 윤리 규범이다. 이는 타인이 불쾌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즉, 내 기준이 상대에게 침범 될 소지를 사전에 방지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동양적 사고는 독일 철학자 칸트의 윤리학에서도 흥미로운 연결점을 가진다. 칸트는 성경의 골든 룰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지나치게 주관적인 기준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았다. 시대상으로 농경시대나 중세시대에는 삶의 방식이나 가치가 크게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좋은 것과 타인에게 좋은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근대로 오면서 새로운 가치와 복잡한 관계들이 생겨나고 결국 나의 가치와 타인의 가치가 불합치되는 상황을 계속 마주하게 된다. 이에 따라 칸트는 “내가 좋아하니까 남도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은 타인을 고려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며, 보다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도덕 기준을 제시한다. 그가 제안한 정언명령은 다음과 같다.
“네 행위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칙이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이는 행위의 결과나 개인적 욕망이 아니라, 그 행위가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원칙인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앞서의 예를 다시 보면, 지하철 트로트나 술 권유는 ‘이것이 누구에게나 적용 될 수 있는 보편적 규칙이 되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 앞에서 재고대상이 된다.
이러한 칸트의 정언명령은 유교의 “기소불욕, 물시어인”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둘 다 개인을(주체) 벗어나 타인(대상)의 입장과 보편성(법칙)을 고려해 판단하는 윤리라는 점에서 그렇다. 유교의 가르침이 ‘상대방이 어떻게 느낄지를 먼저 고려하라’는 조심스러운 배려라면, 칸트의 윤리는 ‘그 행동이 법칙이 되어도 정당한가?’를 묻는 이성적 윤리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골든 룰은 언뜻 역지사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그 기준이 자의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반면 유교의 황금률과 칸트의 정언명령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보편성이라는 점에서 더 넓고 안정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다양한 문화와 입장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에서, 신중하고 소극적인 윤리 태도는 오히려 더 좋은 관계의 법칙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