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 박태환 선수가 남자 자유형 400m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다. 72년 만에 아시아인의 자유형 금메달이었다. 이 소식은 전 세계로 퍼졌고 그는 마린보이라 불렸다. 물속에서만큼은 누구보다 대단했던 박태환 선수도 제주도에서 오신 할머니와의 숨 참기 대결에서 지고 말았다. 그분은 해녀였다. 평생 물질을 해 온 해녀의 호흡은 제아무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도 범접할 수가 없었나 보다. 그런 해녀도 바다에 가면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물숨이다. 물숨은 말 그대로 공기가 아닌 물을 들이켜는 숨이다. 생과 사를 가르는 숨이다. 참고 참다가 마지막 순간에 물을 들이켜면 제아무리 베테랑 해녀도 어찌할 재간이 없다. 해녀들이 물숨을 두려워하는 이유다.
해녀는 자기 숨의 크기를 안다 (출처: 해녀박물관)
해녀의 세계에도 계급이 있다. 짬밥 순은 아니고. 타고난 숨 크기로 계급이 결정된다. 호흡이 긴 순서대로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하군은 똥군 이라고도 한다. 계급별로 나갈 수 있는 바다도 정해져 있다. 하군은 수심이 낮은 바다에서 물질을 한다. 중군은 그보다는 더 멀리까지 가고, 상군은 셋 중 가장 멀리 간다. 먼 바다일수록 잡을 수 있는 것이 많으니 누구나 그곳을 꿈꾼다. 그렇다고 아무나 그곳에 가진 않는다. 아니 가서는 안 된다. 상군이 물질하는 곳에 하군이나 중군이 갔다가 자칫 물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숨의 한계를 알고 그것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 목숨을 지키는 일인 셈이다.
그렇다고 자기 숨이 허락하는 바다에만 머물면 물숨에서 자유로운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거기서도 물숨으로 목숨을 잃는 해녀들이 있다. 욕심이 생길 때 그렇다. 숨 쉬고 다시 들어가면 되지 않나 싶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은가 보다. 베테랑 해녀의 말을 빌리면, 분명 위치를 확인하고 올라왔는데 내려가 보면 희한하게 그 자리를 찾을 수 없단다. 하긴 1.5m 깊이의 깨끗한 수영장에서 잠수하는 것과 같을 리가 없다. 가장 숨이 짧다는 하군도 5m를 내려가고 상군은 무려 20m를 내려간다지 않나. 게다가 바닷속이면 물살도 빠르고 가시거리도 짧을 테니 지금이 아니면 영영 놓치는 셈이다. 욕심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출처: www.atlasnetwork.org)
물숨은 바다에만 있을까. 예전에 모 그룹 회장이 투신자살한 적이 있다. 다이아몬드 수저인 그가 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랬을까. 스스로 목숨을 끊은 톱스타도 여럿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경주마처럼 맹목적으로 공부에 달려드는 이유가 뭔가. 어릴 때 연예기획사에 들어가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청춘을 다 보내는 이유는 뭔가. 퇴근 후에도 자기계발이며 인맥 쌓기에 혈안인 직장인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건가. 더 벌고, 더 인기 있고, 더 잘 나가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정점에 있는 사람은 반대로 뛰어내렸다. 뭔가 잘못됐다.
‘적당히 만족하지’라고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찰 일이 아니다. 나만 해도 그렇다. 학창 시절에는 조금만 더 공부 잘했으면 했고, 직장에 다닐 때도 조금만 더 연봉이 높았으면 했다. 장사할 때도 조금만 더 주문이 들어왔으면 했고, 모임 운영을 할 때도 조금만 더 모임이 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쓸 때도 조금만 더 잘 쓰길 바랐다. 당시의 나에게 ‘왜?’라 물어보면 대답은 대동소이 할 게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대단한 성취를 바란 건 아니었다. 다만 성장 일변도 세상에 살다 보니 본능적으로 ‘조금만 더’를 갈구했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만족이라든지 자족이란 건 뒤처진 자들의 구구한 변명 같아서.
육지물숨은 바다물숨과는 조금 다른지도 모르겠다. 바다의 물숨이 단박에 생사를 가른다면. 육지에서의 물숨은 그것보다는 대략 오십 분의 일 정도의 강도를 가진다고나 할까. 물론 오십 번을 다 채우면 결과는 동일하겠지만. 만약 육지의 물숨이 바다의 물숨과 같았다면, ‘조금만 더’를 생각했을까.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기꺼이 주어진 것에 만족했으리라. ‘분수를 알라’는 말이 있다. 별로 듣기 좋은 소린 아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틀린 것만도 아니다. 아니 꼭 필요한 경우도 있다. 분수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란 뜻도 있고, ‘사람으로서 일정하게 이를 수 있는 한계’를 뜻도 있다. 전자로 사용되면 물론 기분이 나쁘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라며 한바탕 대거리를 벌이고 싶어진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능력의 한계는 분명 존재한다. 학창시절에 한계를 절감한 적이 있다. 아무리 공부해도 몇몇은 도저히 못 이기겠더라. 공부 머리를 타고난 것 같았다. 너무 궁금해서 어떻게 공부하는지 물어봤다. “나는 책을 보면 사진 찍은 것처럼 기억에 다 남아.” 맥이 탁 풀렸다. 사진처럼 기억이 난단다. 난 밤새 빨간 펜으로 줄 치고 별표 치면서 달달 외워도 될까 말까인데. 그렇다고 거기서 펜대를 놨다거나 한 건 아니다. 단지 깨달았을 뿐이다. 공부 잘하는 머리가 있구나. 나도 노력하면 중상 이상은 했다. 최상위권이 안 될 뿐.
직장 다닐 때도 그랬다. 어디 가나 잘 어울리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내부고객 외부고객 가리지 않고 다 잘 어울리는 사람. 여기저기 술자리에 안 끼는 곳이 없고 딱히 불만도 없는 사람. 한 자리에 진득하니 있어도 별로 지루해하지 않는 사람. 직장생활에 최적화된 사람이다. 직장인으로선 참 부러웠다. 반면 나는 어떤가. 앞에 아는 사람이 걸어가면 마주치지 않으려고 괜히 걸음을 늦춘다. 술자리에 나가긴 하지만 어떻게든 중간에 도망치고 싶다. 호기심이 사방에 뻗어있어 한 자리에 진득하게 있는 건 고문과도 같다. 그래도 중상 이상은 갔다. 특급이 안 될 뿐.
공부 머리를 타고나는 사람이 있고 직장생활을 타고나는 사람이 있다. 그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상군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들도 노력한다. 나는 두 분야에서 모두 중군이었다. 내 자존감을 위해 조금 후하게 평가하면 중상군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에 1등은 못해도 2, 3등은 해봤고, 직장에서 1급은 아니어도 2+급은 받아봤으니. 거의 매년 포상도 받았고 승진도 빨랐으니 대단히 뒤처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아주 어울리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으면 있을수록 상군이 못 되는 내가 불쌍하게 여겨지는 자리였다.
한계를 알고 순종할 때 자유로워진다. (출처: 해녀박물관)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한다. 노력하면 따라는 간다. 어쩌다 두어 번 앞설 수도 있다. 다만 내상의 크기다 다르다. 뱁새는 그렇게 뛰고 나면 재활 치료도 받고 녹용도 마시고 연고도 발라야 한다. 반면 황새는 자고 나면 그만이다. 굳이 황새를 목표로 삼는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어쨌든 죽어나는 건 뱁새다. 뱁새는 뱁새의 영역이 있다. 갑작스러운 위험이 닥쳤을 때 황새는 뱁새의 순발력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보기엔 경망스러워도 뱁새는 쪼르륵 잘만 날아간다. 반면 황새는 큰 날개를 몇 번이나 펄럭펄럭 거려야 하늘에 오른다. 순발력만큼은 뱁새가 상군이고 황새는 똥군인 셈이다.
내가 상군이 되는 자리는 어디일까. 그곳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봤다. 회사도 네 군데 다녀보고, 장사도 해보고, 요리도 배우고, 자격증도 따보고, 전국에서 수백 명을 만나기도 하고, 책도 써봤다. 로또처럼 딱 한 방이 터지길 기다리며. 여전히 그 자리는 보이질 않는다. 어쩌면 이 세상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시간 낭비만 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전에 몰랐던 내 한계를 알게 됐다. 내 한계를 안다는 것은 미리 폭탄 위치를 알고 지뢰밭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저 선을 넘어가면 난 죽고 말아.’
해녀는 주어진 숨의 크기에 순종한다. 이정도밖에 안 된다는 수동적인 순종이 아닌, 이 안에서는 내가 하고픈 대로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순종이다. 숨의 크기를 모르는 해녀는 물숨이 두려워 마음껏 물질을 할 수 없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해녀만이 자유롭게 물질을 할 수 있다. 한계를 알고 순종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