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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형 Nov 14. 2019

내가 귀하면 너도 귀하다

바닥에서 힘없이 파닥거리는 새끼 새를 발견했다. 우리가 유일한 목격자는 아니었다. 멀리서 어미 새가 난리가 났다. 더 멀리 담벼락 위에서는 길고양이가 조심스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포식자의 등장에 놀란 새끼가 둥지에서 떨어진 모양이다. 그냥 지나치려니 불쌍하고, 그렇다고 저 높은 둥지까지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단 계란 쥐듯 조심스레 새를 들어 올려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가지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다 죽어가던 새끼 새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몇 번 큰소리를 냈다. ‘이제 살았구나.’ 생각하자마자 새끼 새는 고개를 떨궜다. 늦가을에 낙엽 지듯 툭.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미 새가 어찌나 크게 울어댔는지 길 가던 사람이 모두 멈춰 설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새끼를 데리러 오지는 않았다. 울기만 할 뿐이었다. 고양이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숨 떠난 육체에 불과한 새끼 새만큼 손쉬운 먹잇감도 없으리라. 하는 수 없이 다시 조심스럽게 새끼를 들어 올렸다. 음식물인지 소화액인지 모를 하얀 이물질이 입가에 삐쭉 새어 나와 있었다. 혹시나 해서 이물질을 닦아주고 가슴께도 몇 번 눌러 봤지만 소용없었다. 한번 몸을 떠난 숨은 돌아오질 않았다.


고양이는 호시탐탐 새끼 새를 노리고 있었다. (출처: 언스플래쉬)


고양이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되도록 먼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양지바른 곳을 찾아 땅을 팠다. 신발 뒷굽으로 퍽퍽 파다가 안 되겠다 싶어 두툼한 나뭇가지를 가져와 다시 팠다. 새끼 새를 구덩이에 조심스레 뉘었다. 구덩이가 조금 얕아 보였다. 길고양이가 냄새를 맡고 땅을 팔 수도 있겠다 싶어 새를 다시 꺼낸 후 더 깊게 팠다. 발목이 잠기고도 남을 정도로 판 후에 다시 새끼 새를 넣었다. 흙으로 꼼꼼히 덮고 그 위에 낙엽까지 덮었더니 감쪽같았다. 잠시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아들이 물었다.


“새가 왜 죽었어?”

“글쎄, 아팠나 봐.”

“그런데 왜 땅에 묻었어?”

“밖에 두면 추울 수도 있잖아.”


고양이가 땅을 파서 시체를 먹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낙엽으로 덮어주면 되잖아.”

“바람에 날아가 버리면 어떡해. 땅에 넣고 흙으로 덮어야 안전하고 따뜻한 거 아냐.”

“사람도 땅에 묻어?”

“그럼, 살아있는 건 죽으면 모두 땅에 묻지.”

“아빠도?”

“그럼 아빠도 땅에 들어가지.”

“그래? 그런데 슈퍼에는 언제 가?”

“맞다. 슈퍼 가자.”


아들은 한 생명의 죽음을 보았고 조촐한 장례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의미를 이해하진 못했다. 어미가 처절하게 울어댄 이유도, 아빠가 잠시 기도한 이유도 모른다. 더 커서 입관과 발인도 보고, 화장이나 매장도 보면서 누군가와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을 겪으면 이해하겠지. 나와 친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마지막 가는 길엔 마땅히 갖춰야 할 예의가 있다는 것을.



죽음을 그저 현상으로 받아들이라는 이도 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열매 맺고, 가을이면 낙엽 지고, 겨울이면 죽은 듯 잠잠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하라고. 쓸데없이 감정이입 하지 말고. 그래, 죽음 자체는 별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해석하기 나름이지. 그런데도 이제 막 태어난 임팔라 새끼가 산채로 하이에나무리에 잡아먹히는 걸 보면 도무지 현상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지만 아이를 키우는 입장인지라 남 일 같지 않아서.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게 야생에서의 삶이다. 하루하루 얼마나 살얼음판 같을까. 하지만 야생동물은 생각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고 한다. 닥치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며 스트레스받는 존재는 아마 인간이 유일하지 싶다. 나 홀로 아프리카에 남겨진다면 어떨까. 밤마다 차가운 공기에 실려 오는 맹수의 그르렁거리는 소리에 채 며칠도 못가 각종 스트레스성 질병에 시달릴 게 뻔하다. 잡아먹혀 죽기 전에 먼저 스트레스로 죽을지도 모르겠다. 임팔라는 다르다. 새끼를 잃는 순간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해가 뜨면 미련 없이 무리를 따라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때가 되면 다시 새끼를 낳을 테고. 대부분 동물은 먼저 간 새끼를 가슴에 묻지 않는다.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살아갈 뿐.


가을이면 낙엽지듯 죽음이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야 (출처: 언스플래쉬)


새끼 새의 어미도 다르지 않을 게다. 동네가 떠나가라 울부짖었지만, 조만간 새로운 곳에 다시 둥지를 틀고, 사랑하고, 알을 낳겠지. 한동안 꼼작 않고 알을 품을 테고. 새끼가 태어나면 부지런히 벌레를 물어다 주고 때가 되면 각자의 길을 가겠지. 둥지 밖으로 떨어져 마지막 숨을 몰아쉬다 죽어버린 새끼를 기억하는 건 어미도, 길고양이도 아니다. 함께 있던 아들도 아니다. 오직 나뿐이다. 조촐하게 장례를 치러준 건 내심 어미가 박 씨를 물어다 주길 기대해서는 아니었다. 피차 숨 쉬는 처지에 지켜야 하는 예의였다. 죽고 사는 것이야 내 손 밖의 일이라지만, 뒤처리 정도는 내 의지로 할 수 있으니.


어떤 숨은 태풍에 요동치는 파도처럼 격렬하게 내 마음을 움직인다. 때로는 자책과 허무로, 때로는 희망으로. 반면 어떤 숨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쳐다보는 기분이랄까. 모든 숨이 귀하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크기로 나에게 다가오진 않는다. 나는 이기적인 존재라 무언가의 가치를 정할 때 나와의 거리부터 재곤 한다. 나와 가까운 사이인가 아니면 먼 사이인가. 그렇게 보면 새끼 새는 나와 아주 먼 곳에 있는 존재였다. 비록 시간을 내어 묻어주긴 했지만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생명은 그 자체로 귀하다.


세상 모든 것이 상대주의에 물들어가고 있다. 당연히 지켜야 할 것이 사라지고 있다. 법을 지키는 것이 곧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법은 최소한의 도덕일 뿐이다. 최소한의 것을 전부로 여길 때 인간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행동해왔던가.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법률’, ‘국가 시민법’을 제정한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합법적으로 어떻게 대했는지 우리는 잘 안다. 상대주의는 다양성의 어머니지만, 무자비와 무신경의 어머니기도 하다. 어떤 것은 변함없어야 한다. 죽어가던 새끼 새를 모른 척하고 지나쳤대도 법적으로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도 숨 쉬는 존재 간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양심과 예의는 있었다. 내가 귀하면 너도 귀한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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