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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형 Nov 14. 2019

노령견 공주 이야기

하루에도 몇 번씩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할머니가 있다. 매번 길이 어긋나 가까이서 뵌 적은 없다. 하지만 워낙 깡말라서 바지며 소매며 깃발 나부끼듯 펄럭거리기에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것 말고도 독특한 점은 또 있다. 얼굴을 다 가리는 검은색 썬 캡. 그리고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강아지의 걸음걸이다. 아무리 걸음이 서툴러도 산책을 나오면 어느 정도 활기가 있기 마련인데 그 강아지는 이상하리만치 조심스러웠다. 아장아장 몇 걸음 옮기다 제자리에 우뚝. 또 몇 걸음 가다 우뚝. 어쩜 저렇게 겁이 많을까. 덕분에 둘의 산책은 늘 가다 서다의 반복이었다. 50m도 채 안 되는 길을 마치 영원히 갈 것처럼. 아무튼 눈썰미 없는 사람이라도 두세 번만 보면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조합임은 틀림없다.


어느 날이었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그 묘한 조합이 경비실 앞에 있었다. 호기심이 생겼다. ‘강아지 얼굴이나 한번 볼까.’ 한 걸음 두 걸음. 카메라 줌인하듯 강아지 얼굴이 점점 커졌다. 세상에나. 전혀 몰랐는데 노령견이었다. 많은 개를 봤지만 이렇게 나이가 든 개는 처음인듯했다. 얼마나 나이가 많은지 털이 빠지다 못해 속살이 거의 다 드러날 정도였다. 민낯을 드러낸 연분홍 속살 위엔 거뭇한 검버섯이 선명했고, 생기 없는 흰색 눈동자를 보니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지 한참 돼 보였다. 관절이라고 성할 리 만무했다. 다리가 제대로 굽혀지질 않아 목발 짚고 다니는 것처럼 뻣뻣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아기처럼 아장아장 걸었던 이유가 있었다.


“강아지 산책시키시나 봐요? 예전에 진돗개를 14살까지 키웠었는데 얘는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네요.”


“아, 그러시구나. 얘는 올해로 19살이니까 사람 나이로 치면 90살쯤 됐을 거예요. 이름은 공주.”


“19살이요? 공주 진짜 나이 많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내가 쉰 때 처음 집에 데려왔는데 벌써 내 나이가 칠십이 다 됐으니.”


사연인즉 아들딸이 크고 나니 왠지 좀 적적해져서 푸들 한 마리를 분양받아오셨단다. 조용한 집에 천방지축 강아지가 등장했으니 그 부산스러움이 오죽했을까. 처음에는 힘들기도 했는데 간만에 집에 활기가 도는 걸 보니 너무 좋으셨다고. “이름을 공주라 지어서 그런가, 예쁜 짓만 골라서 했어요.” 이를테면 용변은 꼭 화장실에 깔아놓은 패드에 봤다든지, 티브이 리모컨과 에어컨 리모컨을 구분했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공주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시는데 영락없는 자식 자랑하는 부모 얼굴이었다. 공주를 쳐다보는 두 눈에는 사랑이 뚝뚝 묻어나왔다.


출처: https://www.aginginplace.org/


한참 이야기 중에 공주가 나에게 다가왔다. 정확히는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다 우연히 내 곁으로 와버린 것이다. 폭. 공주의 코가 내 신발에 닿았다. 흠칫하더니 이내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 공주. “괜찮아, 괜찮아. 엄마한테 와.” 할머니는 정체 모를 두려움에 휩싸여 떨고 있는 공주를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그리고 힘없이 축 처진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쉬이, 쉬이” 하면서 안정을 시켰다. 떨림은 그제야 멈췄다. 


“눈도 안 보이고 들리는 것도 없으니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흠칫 놀래요.”

 


할머니의 가장 큰 고민은 단연 공주의 건강이었다. 본격적으로 치매가 시작되었는데 고령이라 딱히 치료 방법이 없다고 한다. 대소변을 못 가리는 것은 물론, 자다가 몇 번이고 경기를 일으켜서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다. 앞으로 몇 년이나 남았을까. 아니 올해를 넘길 수나 있을까. 언젠가는 겪을 일이지만 막상 그 시간이 이렇게 성큼성큼 다가오니 많이 착잡하신 듯했다.


“딸 같아요. 욕심 같아서는 한 5년만 더 살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럼 공주가 너무 힘들겠지요?”


공주는 고개 들어 할머니의 얼굴을 몇 번 핥았다. 할머니는 그제야 공주를 조심스레 땅에 내려놨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둘은 천천히 산책을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우뚝. 세 걸음 네 걸음 우뚝. 공주의 발걸음에 맞춰 할머니도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공주는 방향을 모를 때만 멈추는 건 아니었다. 중간중간 지친 몸을 쉬기 위해서도 멈췄다. 그럴 때는 엉덩이를 땅바닥에 털썩 붙이고 앉았다. 할머니는 그런 공주를 재촉하는 법이 없었다. “왜 힘들어? 좀 쉬었다 갈까? 그래 여기서 좀 쉬자.” 다시 공주가 일어날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셨다. 저 앞에 있는 벤치까지 가는데 만도 하 세월이 걸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기꺼이 자신의 딸 같은 공주의 의견을 따랐다. 서고 싶으면서고, 가고 싶으면 가고. 그 둘은 평생 수백 번은 오갔을 길을 마치 처음 가보는 길처럼 조심스레 걸어갔다.


보이지 않는 눈과 들리지 않는 귀. 공주가 의지할 것은 주인밖에 없다. 목줄에 긴장이 느껴지면 위험하다는 신호. 풀리면 안전하다는 신호. 그것만 신뢰하고 간다. 평생 내 곁에 있어 준 이 사람은 결코 나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으리라는 철석같은 믿음으로. 그러고 보니 나와 부딪혀 순식간에 불안이 엄습했을 때도 귓가에 스치는 할머니의 숨결에 금방 잠잠해지지 않았던가. 어쩌면 신뢰 그 이상인지도 모르겠다. 추억을 회상하며 마치 딸을 쳐다보듯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그 눈빛. 내가 아닌 너의 리듬에 맞춰 천천히 옮기던 발걸음. 그리고 안정을 찾아주기 위해 “쉬이, 쉬이” 소리를 내며 귓가에 천천히 불어주던 숨결까지. 19년이란 긴 시간 동안 둘이 쌓아온 것은 주인과 반려견간의 신뢰 그 이상이다.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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