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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형 Nov 16. 2019

희망의 숨을 뱉어낸 아이

아이가 밤새 컹컹 소리를 내며 기침을 했다. 어제 친구랑 한바탕 뛰어놀고 집에 오는 길에 감기 기운이 들었나 보다. 다음 날 아침. 아내가 오늘은 점심때쯤 유치원에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러자고 했다. 몇 시간이라도 쉬었으면 하는 부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고새 마루에 장난감을 촤악 펼쳐놓고 놀기 시작했다. 시간도 많겠다, 아플 때는 으레 엄마가 밥도 먹여 주겠다, 아주 살판났다. “자, 이리로 와서 한입 또 먹어” 두 손에 장난감을 꼭 쥐고 온 아이는 입을 아 하고 벌렸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치열한 전투 현장을 향해 있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놀았는지 머리끝이 축축하게 젖었다. 콧등과 인중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애가 한참 앓은 후에는 병간호하느라 지친 아내가 아프곤 했는데 다행히 이번 감기는 잠시 스쳐 지나갈 것 같다.


배가 불러오는 만큼 기대와 두려움도 커졌다 (출처: 언스플래쉬)


아이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일 년 후에 태어났다. 신혼을 충분히 즐기고 아이를 갖기로 했고, 그렇게 갖은 아이였다. 임신을 계획할 순 있어도 부모 마음을 갖는 것마저 계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평생 갈 일 없던 산부인과를 처음 간 날 굉장히 어색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그럴진대 아내는 오죽했을까. 그래서 병원에 갈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항상 함께 갔다. 매일 산책도 함께 하고 주말에 있는 출산 교육도 함께 받으러 다니면서 조금씩 부모 준비를 했다. 3~4개월까지는 티가 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배가 금방 불러오기 시작했다. 그만큼 기대와 두려움도 커졌다. 임신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전보다 더 가까워짐을 느꼈다. 흡사 전우애 같았다.


우린 맞벌이였다. 출산을 앞두고 아내는 육아휴직을 했고 나는 계속 회사에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막 회의에 참석하려 할 때 아내가 전화를 했다.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가쁜 숨을 내쉬던 아내는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지금…. 집에 오면 안 될까?” 출산이 임박했다. 팀장님에게 사정을 말하자 얼른 가보라며 등을 떠미셨다. 가방을 채 싸지도 못한 채 회사를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도무지 심장이 진정되질 않았다. 도착해보니 아내는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동안 배운 산통을 줄이는 마사지를 해줬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얼른 병원으로 향했고 바로 입원을 했다.


우리는 자연주의 출산을 하기로 했었다. 유도분만 보다는 때가 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렸다가 출산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일단 진통이 시작되자 아이가 나오기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진통은 거의 하루를 갔다. 그런데도 아내는 큰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아내는 그런 사람이다. 인내심이 강하다. 호들갑 떠는 성격도 아니다. 지칠 법도 한데 잘 참았다. 빨리 나오지 않는 아이가 야속했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진통은 파도 같았다. (출처: 언스플래쉬)


진통은 파도 같았다. 통증과 함께 몰려왔다가 이내 썰물처럼 사라졌다. 왔다가 또 사라졌다. 그 간격이 줄어들수록 출산이 임박했다는 사인이라 했다. 마침내 때가 됐다. 수중분만을 위해 욕조로 향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은 아이는 여전히 엄마 배에 머물러 있었다. 한참을 물속에 있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 출산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순조로운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증세가 곳곳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장 큰 문제가 터졌다. 아이의 심박 수가 조금씩 떨어지는 것이었다.


담당 의사도 판단이 잘 안 섰다. 제왕절개를 해야 하나.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 이런 경우가 전혀 없진 않다고 했지만, 표정은 한껏 긴장한 모습이었다. 다행히 심박 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갑자기 심박 수가 눈에 띄게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간. 의사는 나에게 제왕절개 준비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섣불리 결정할 수 없었다. 아내가 얼마나 오래 참았던가. 제왕절개를 할 생각이었으면 진즉 했겠지. 이제 와서 제왕절개를 한다면 아내의 노력이 수포가 되는 게 아닌가. 10초가 10분 같이 느껴졌다. 아내와 상의하고 싶었지만, 아내는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이제는 결정하셔야 해요. 더 늦으면 둘 다 위험할 수 있어요.”


이렇게 느닷없이 생명의 결정권을 맡기는 법이 어디 있나. 아, 위험이란 말 한마디에 나는 잔뜩 겁먹은 어린이가 되어 버렸다. 당신이 전문가 아닌가. 당신이 판단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절차상 그런 결정은 보호자의 몫이다. 그 자리에 있던 유일한 보호자인 내가 결정할 일이었다. “해 주세요” 아내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 산통을 다 겪었는데 내 한마디로 그간의 수고가 물거품이 된 것 같아서. 하지만 생명이 위험하다는데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나. 아내는 급히 수술실로 옮겨졌다. 나는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수술실 앞을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대체로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왜 울음소리가 안 들리지.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제왕절개면 아이가 바로 나오는 거 아니었나?’



숨은 희망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출처: 언스플래쉬)


얼마나 기다렸을까. 수술실 문이 벌컥 열렸다.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의사가 말했다.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합니다. 아직 마취 중이라 깨는 대로 바로 병실로 가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아이 울음소리는 왜 안 들리지?’ 슬쩍 병실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내 상상대로라면 아이는 붉은 핏기가 돌며 응애하고 울고 있어야 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것처럼. 하지만 아이는 조용했다. 붉기는커녕 어디에서 얻어맞은 듯 시퍼런 색이었다. 아이는 수술대에 축 늘어져 있었다. 의사는 수동식 인공호흡기로 아이 입에 연신 공기를 불어 넣고 있었다. 무사하다는 말을 못 들었다면 자칫 오해할 법한 풍경이었다. 반사적으로 “감사합니다.”라고 했지만,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나중에 들었는데 워낙 수술이 긴급했다고 한다. 아이의 숨이 거의 끊어질 지경이라 아내는 마취가 채 되지도 않은 채 생살을 찢겨야만 했다.


하마터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잃을 수도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으론 이 둘 곁에만 있겠다.’ 살면서 수많은 결심을 했지만, 이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전까지 세웠던 인생계획은 아무 의미 없이 느껴질 정도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얼마나 자책하고 허무했었나. 돌이켜보면 그런 부류의 후회는 대부분 지속적인 관계의 부재에서 비롯했다. 평소 자주 찾아뵈었다면 덜 자책하고 덜 허무했을 테니. ‘나중에 해도 된다.’는 생각만큼 큰 착각은 없다. 있을 때 잘해야 한다. 그나마 기회가 있을 때.


내 인생의 최고의 선물은 다름 아닌 아내와 아이다. “언제 가장 행복하세요?”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족과 같이 있을 때 행복합니다. 함께 장보고, 밥 먹고, 산책하고, 아이스크림 사 먹고, 여행 준비를 하고, 보드게임 할 때 행복합니다. 딱히 함께 뭔가 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행복해요. 아내와 아이가 행복해하면 마치 제가 영웅 같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이 둘과 함께 지내고, 이 둘을 웃게 해주려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상상하고 싶지도 않지만 어쩌면 그날 아이는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너무 대견하고 은혜롭게도 아이는 절망을 삼키는 대신 희망의 숨을 뱉어냈다. 하나님의 배려였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사람의 숨은 어떤 모양으로든 부정적인 결과를 만든다고 믿던 내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가르침이었을 수도 있겠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도 기어이 돌아와 행복의 시작을 알리는 숨도 있다고. 그런 기적의 숨, 희망의 숨을 발견하면 다시는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콱 움켜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숨은 희망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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