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숨이란 판소리를 할 때 숨 쉴 곳이 아닌 곳에서 몰래 짧게 숨을 들이쉬는 숨을 말한다. 이 숨을 연습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언제 숨 쉬는지 손짓으로 알려주지 않았다면 결코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가요를 듣다 보면 중간중간 ‘스으읍’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도둑숨은 당연히 그런 소리가 없다. 그렇다고 소리를 내지 않고 쉬는 것도 아니다. 소리를 내지만 뒤이어 오는 발음에 교묘하게 뭉개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실로 도둑숨이라 불릴 만하다.
창이 아니더라도 도둑숨은 우리 삶에 꽤 유용하다. 예전 직장에 도둑반차를 쓰는 동료가 있었다. 대부분은 금요일이나 월요일에 연차를 썼다. 주말을 포함해서 3박 4일을 내리 쉬려고. 그런데 그 친구는 뜬금없이 수요일에 반차를 쓰곤 했다. 이유가 궁금했다. “왜 넌 늘 수요일에 쉬어? 그것도 반차를.” “중간에 이렇게 짧게 쉬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더라고요.” 생각해보니 과연 그랬다. 유독 월요일이 힘든 이유는 앞으로 나흘 동안 꼼짝없이 회사에 나가야 하기 때문이 아니던가. 금요일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앞으로 이틀 동안 쉴 수 있어서고. 수요일에 반차를 내면 일요일에 이런 생각이 들게다. ‘앞으로 이틀만 가면 쉰다.’ 물론 수요일 오전에는 나가겠지만 메일 몇 개 보내면 금방 점심시간이다. 돌아오는 길에 차라도 한 잔 마시면 바로 퇴근이고. 다음날 출근하면서 또 이런 생각을 하겠지. ‘하루만 더 나가면 주말이다.’
이 얼마나 교묘한 방법이란 말인가. 동료들은 그 친구가 그런 식으로 반차를 내는 줄도 몰랐다. 좀 쉬면서 하라고 조언하는 선배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언젠가 길게 휴가를 가더라도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쟤는 좀 쉴 필요가 있어.’라고 생각들 했으니까. 왜 이런 방법을 모르고 있었을까. 참으로 기막히고 기특한 방법이란 생각에 바로 따라 했다. 평일에 한 번 쉬어가니 확실히 숨통이 트였다. 전보다 월요병도 줄었다.
직장을 나온 지금 내가 도둑반차를 쓸 일은 없지만, 이제는 아들에게 사용한다. 요즘 유치원은 옛날 같지 않아서 배우는 것이 많다. 초등학교보다 하원도 늦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오늘은 유치원 가기 싫어’라는 말이 부쩍 늘었다. 결정적으로 아이가 월요일이 싫다고 말했다. ‘이제 월요병이 시작됐구나.’ 그래서 나는 아이의 숨이 차오르는 것 같으면 지체 없이 도둑반차를 내준다. 유치원을 하루 빼주고 대신 교외로 바람을 쐬러 가거나, 여유 있는 달이면 1박 2일 여행도 간다. 그러고 나면 몇 주는 잠잠하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할 셈이다. 나도 좋았는데 너는 오죽 좋을까 싶어서.
도둑반차가 있는가 하면 도둑대답도 있다. 둘째 누나로부터 배웠다. 첫째 누나와 나는 부모님 잔소리에 바로 반응을 보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진 알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듣는 성격도 아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한다. 기껏 도움 되라고 해주신 이야기에 토를 다니 부모님 마음도 좋을 리 없다. 부모님과 우리는 늘 이런 식으로 옥신각신한다. 하루는 둘째 누나가 이런 말을 했다.
“가만 보면 언니랑 너는 참 답답해.. ‘네’하고 넘어가면 될 일을 굳이 그렇게 일을 키우니?”
“부모님이 상황을 잘 모르시잖아. 알려 드려야지.”
“야, 그냥 ‘네’하고 뒤돌아서 너 하고픈 대로 해.”
“확인하실 거 아냐.”
“넌 아직도 부모님을 모르니. 확인 안 하셔.”
“그래? 그럼 누난 알겠다고 하고 안 해?”
“당연하지. 그걸 일일이 어떻게 해. ‘네’하고 넘어가면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좋고, 너는 너 하고픈 대로 하면 되니까 좋잖아. 왜 그걸 못할까?”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동안 나는 내 입장만 지키느라 부모님 잔소리에 격하게 반응했다. 생각해보니 부모님의 걱정이란 건 대단한 게 아니었다. 나한테는 어떤 음식이 잘 맞으니 꼭 챙겨 먹으라거나, 나중에 고생 안 하려면 애들 어떤 공부 시키라거나 그런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매번 문자로 “너 챙겨 먹었니? 애 학원 보냈니?”라고 확인하시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생각날 때 같은 말씀을 하실 뿐이었다. 챙겨 먹어라. 공부시켜라. “네”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부모와 자식 간이라도 어찌 생각이 늘 같겠나. 아니 오히려 서로를 더 잘 알기에 많이 부딪힐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약한 부분을 잘 알기에. 나와 첫째 누나가 ‘이제 성인이 된 나를 인정해 달라’며 부모님과 대치상황을 벌일 때 둘째 누나는 “네” 한마디로 상황을 조기에 종결시키곤 했다. 역시 머리 굴리기로는 둘째를 따를 수 없다. 그런데도 관성이 있어서 부모님의 잔소리에 눈썹부터 꿈틀거리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 더 연습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방법을 의외로 아내가 잘 써먹는다. 누나와의 대화를 듣고 무릎을 '탁' 쳤다고 한다. ‘유레카!’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지만 여전히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기 마련. 게다가 평생 남으로 살아왔으니 서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지 않겠나. 내가 볼 땐 어머니의 습관적인 말투인데 때로는 아내에겐 비수가 되기도 한다. ‘무슨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 시어머니가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상처받는 며느리. 아내는 이제 둘째 누나가 알려준 방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네, 어머니”가 입에 뱄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무시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머니가 습관적으로 하시는 걱정에 “네, 어머니”라 한다.
“너희들이 아직 어려서 교육을 몰라. 내가 말 한 거 해봤니?”
“네, 어머니.”
“너무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지 않니. 뭐 좀 하지 그러니?”
“네, 어머니.”
엄마보다 자기 자녀에게 더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자녀 얼굴만 봐도 배가 고픈지 졸린 지 속상한 일이 있는지 알아채는 게 엄마 아니던가. 내 아이에게 좋다는 것은 하지 말라고 도시락 싸 들고 말려도 기어이 하고 마는 게 엄마다. 교육관은 다를 수 있다. 다만 어머니와 아내의 교육관이 다를 때 나는 아내 편이다. 아내만큼 아이를 잘 아는 사람은 없으므로. 아내가 밖에 나가지 못하는 이유도 아이 때문이다. 아이만 없었다면 아내도 커리어를 포기할 일은 없었을 게다. 지금쯤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을 사람이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상황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강도도 다르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일부러 아내를 서운하게 하려고 하신 건 아니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결혼 전에 나도 수천 번 들었던 말이니까.
“네가 아직 어려서 몰라.”
“너도 그거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니.”
평소엔 문제 되지 않지만, 기분이 안 좋을 때 들으면 화가 나는 말이긴 하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악의가 있어서, 아들을 떠보려고 그러시는 건 아니다. 나 잘되라고 하시는 말씀이지. 나도 그렇다. 아이에게 어떤 행동을 해라 마라 가르칠 때 본의 아니게 윽박지를 때가 있다. 강하게 표현해서 지레 겁먹게 할 때도 있고. 일부러 애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겁을 주려고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아이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표현이 강하게 나왔을 뿐이다. 나는 사랑이고 어머니는 잔소리라면 너무 이기적인 생각 아닐까. 어머니도 사랑해서 그렇다. 며느리와 가족이 된지도 어언 십 년을 바라본다. 며느리가 아주 딸 같을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가족이 되었다. 손주는 말할 것도 없다. 너 잘되라고. 손주 잘되라고 하시는 말씀이리라.
둘째 누나의 사소한 팁으로 아내의 마음은 아주 편해진 듯하다. 물론 내가 그 마음에 들어가 볼 순 없다. 고부간의 그 미묘한 관계를 감히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변화된 아내를 보면 분명 마음이 편해진 것 같다. 이를테면 빵을 사도 “이거 어머니 좋아하실 텐데 사드릴까?”라고 한다거나, 여행을 가도 “어머니 이 화장품 다 떨어진 것 같더라고. 사 드릴까 봐.” 라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도둑숨은 호흡을 편하게 해준다. 내 호흡이 편하면 노래도 편하고 매끄럽게 부를 수 있다. 그런 노래는 듣는 이의 마음도 편하게 만든다. 균형과 조화를 만드는 숨이 도둑숨이다. 도둑반차도 도둑대답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