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은 대단한 부자였다고 한다. 하인도 많고 주위에 보이는 땅은 전부 외할아버지 소유라 했다. 물론 내 인생에 그런 모습은 코빼기도 본 적 없다. 외손자에게 남겨주신 금 열쇠 하나라도 있었다면, 아니 금가락지 하나라도 구경이나 해봤다면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머니는 내가 본 적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으리으리한 부잣집의 귀한 따님이셨던 셈이다. 인생에 굴곡 없는 이가 어디 있으랴. 어머니의 인생도 그랬다. 어렸을 적엔 한창 상승곡선을 타셨겠지만, 철이 들고 나서는 꾸준히 하강 곡선을 타셨다. 성실한 회사원인 아버지와 결혼한 후에는 한동안 평탄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다시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아버지가 명예퇴직하셨을 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인가 그랬다. 큰누나는 고등학생. 작은누나는 중학생이었다. 애 셋 딸린 집안에 하루아침에 수입이 끊겼다. 월급쟁이 봉급이 다 그렇듯 약간의 적금 외에 재산이란 게 있을 리도 없었다. 부유하게 산적은 없지만 당장 목에 칼이 들어 온 적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우리 집은 급속도로 쪼그라들었다. 또 다른 부잣집 따님이었던 큰이모는 미국에 살고 계셨다. 그 당시 이민 세대가 그렇듯 이모도 힘들게 세탁소를 운영하고 계셨다. 거기도 자녀가 셋이라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다. 그래도 우리 집보단 나았다. 고민 끝에 큰누나는 미국으로 가기로 했다. 돈이 없어서 가는 거였지만 나름 유학이었다. 어린 나이에 홀로 타지에 갔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나중에 들었는데 그 당시 큰누나의 마음고생이 참 대단했었단다.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작은누나도 힘들었을 게다. 한창 어리광부릴 때엔 첫째에 치이고 막내에 치이다가, 막상 사춘기 때는 집이 힘들어졌으니. 자기 배는 안 고파도 어린 동생의 매끼는 챙겨줬다.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굶지 않았던 건 작은누나 덕분이었다. 막내인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집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다.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새집으로 이사 간다기에 마냥 좋아했다. 걸어서 10분 걸리던 등굣길이 버스 타고 1시간이 됐지만 그래야 한다기에 그런 줄 알았다. 비가 오면 친구들은 엄마가 데리러 왔는데 어차피 우리 부모님은 멀어서 못 오시니 그냥 비를 맞고 갔다. 나는 감기가 잘 안 걸리는 편인데 그때 감기란 감기는 다 걸려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비를 맞으면 좋은 점이 또 있었다. 속상한 일 때문에 눈물이 터져도 사람들은 내가 우는 줄 몰랐다. 각자 우산을 푹 눌러쓰고 제 갈 길 가기 바빴으니까. 비가 오는 날엔 마음껏 울 수 있었다.
장난감을 팔기 위해 온 동네 문방구를 돌아다니셨던 어머니 (출처: 언스플래쉬)
어머니는 매일 아침 버스비로 200원을 주셨다. 잔돈이 없을 땐 토큰을 주셨는데 250원짜리라 아깝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산악인 조지 맬러리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왜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려 합니까?”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요. (Because it's there)" 1923년 3월 18일 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의 일부인데 한 번쯤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 버스에서 내린 후에도 한참 언덕을 올라가야 했다. 깜빡 졸아서 한 정거장을 지나치면 그때는 50분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왜냐면 집이 거기 있으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순순히 변화를 받아들였던 나와는 달리 어머니는 적극적으로 변화에 맞섰다. 아버지가 어머니께 퇴직 소식을 전한 날 어머니는 바로 적금을 깨서 보라색 소나타 II를 샀다. 모자란 돈은 친구들에게 빌리셨단다. 당시 아버지는 회사 차로 소나타 I을 타셨는데 퇴사 후에 기죽지 마시라고 최신기종인 소나타 II를 사주신 것이다. 보기 드문 촌스러운 색의 차였다. 예전에 어머니께 여쭤본 적이 있다. 하고많은 색 중에 왜 하필 그 색이었는지.
“영업사원이 그러더라, 검은색이나 회색처럼 인기 많은 색은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그래서 남편 퇴직 날 맞춰야 한다고 아무거나 빨리 되는 거 없냐고 했더니 보라색이 하나 있다잖니. 그거라도 얼른 가져다 달라고 했지. 진짜 촌스럽긴 했어. 그치?”
그나마 있던 돈으로 차를 샀으니 문자 그대로 빈털터리 신세였다고 했다. 퇴직금은 나중을 위해 건드리지 않기로 하셨단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장사를 시작하셨다. 어떻게 받으셨는지 장난감 몇 박스를 집에 가져오셨다. 매직 아트란 장난감이었다. 틀에 물감을 채워 넣고 프라이팬에 살짝 구우면 그대로 굳어져서 냉장고나 거울에 붙일 수 있었다. 몇 개 꺼내서 놀라고 하셨다. 웬일인가 싶어 얼른 두어 개 꺼냈는데 엄청 재미있어서 한참 놀았다. 어머니는 그 박스를 이고 지고 온 동네 문방구를 돌아다니셨다. 얼마나 열심히 돌아다니셨는지 며칠 만에 모두 팔고 오셨다. "후우우" 집에 오시면 큰 한숨을 내쉬며 퉁퉁 부어오른 다리에 파스를 한가득 붙이셨다. 어머니는 아침에 들고 나간 장난감은 어떻게든 다시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다 팔고 오셨다. 팔면 팔수록 더 많은 박스를 가지고 오셨다.
어머니는 홀로 아이에나 무리에 맞서는 암사자 같았다.( 출처: https://imalayalee.org)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크리스마스 전주였던가 이브였던가 그랬다. 4교시 밖에 없는 날이라 집에 가면 1시쯤 될 터였다. 아침에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기억났다. “오늘 엄마 XX 백화점에 있을 거야. 누나는 오늘 학원 때문에 늦으니까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혼자 밥 차려 먹어. 알았지?”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집에 갈 시간이 되니 마음이 바뀌었다. ‘집에 가봐야 아무도 없는데 엄마한테나 가자.’ 선생님에게 XX 백화점 가는 길을 여쭤봤다. 어머니가 그리로 오라고 했다고. 선생님은 메모지를 꺼내 간단한 약도를 그려주셨다. 버스가 아닌 지하철을 타야 한단다. 그래서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이 아닌 20분 거리에 있는 지하철역으로 갔다.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 인근 역에 내렸다. 막상 지상으로 올라오니 길이 헷갈렸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백화점을 찾아갔다.
백화점에 도착해서 안내데스크로 향했다. 어머니 좀 찾아 달라고 했다. “이름이 뭐니? 어머니 성함은 어떻게 되시니? 여기에 무슨 일로 오셨니?”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자기들끼리 뭐라 뭐라 했다. 5분쯤 기다렸나. 지하로 가보라 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다행히 내려가는 길에 어머니 뒷모습이 보였다. 쪼르르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너 여기 어떻게 왔어?” 깜짝 놀라시던 어머니. “그냥 왔지.” 시큰둥 대답하고 나는 매대 뒤로 가서 엄마 옆에 쪼그려 앉았다. “점심은?” “아직 안 먹었어.” 어머니는 1,000원을 주시며 뭐라도 사 먹고 오라 하셨다. 근처에서 떡볶이를 사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갔다.
대목이라 그런지 백화점엔 사람들로 넘쳐났다. 누구는 더 깎아 달라고 했고 누구는 포장해 달라고 했다. 사람이 많아서인지 다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대화를 했다. 흡사 싸우는 소리 같았다. 정신이 없었다. 무섭기까지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더욱 몰려들었고 매대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덜커덩덜커덩했다. 나는 더욱더 낮게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사람들 얼굴은 안 보이고 어머니만 보였다. 어머니는 때로는 소리를 지르셨고, 때로는 웃으셨다. 한 손으로는 잔돈을 거슬러 주시면서 다른 손으로는 포장용 봉투를 팡팡 털어 펴시기도 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새끼를 지키기 위해 홀로 하이에나 무리에 맞서는 암사자 같았다.
"후우우"
한바탕 난리가 지나간 후에 어머니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자포자기의 숨이 아닌 또 다른 전투를 준비하는 숨이었다. “언제가?”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은데? 조금 있으면 누나 오니까 먼저 가 있어.” 같이 가고 싶었지만 계속 기다리기도 뭐해서 알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200원을 쥐여주셨다. 매대를 지켜야 해서 차마 바래다주진 못하셨다. 괜찮았다. 매일 하는 일이니까. 백화점을 나와서 왔던 길로 다시 걸어갔다. 이번에는 지하철이 아닌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집에 오니 누나가 있었다. “점심은?” “먹고 왔어.” “그래? 밥 안 먹었을 줄 알고 빨리 왔지.” “아냐. 엄마가 사줬어.” 정확히는 엄마 근처에서 혼자 먹고 왔지만, 왠지 엄마랑 먹고 왔다고 하고 싶었다. 그러면 좀 위로가 됐다.
때로는 우셨다, 하지만 결코 포기하진 않으셨다. (출처: 언스플래쉬)
어머니가 고군분투하신 덕에 집안 형편은 조금씩 나아졌다. 아니 아버지가 받으시던 월급보다 더 많이 버셨다고 했다. 그 사이 아버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도서관에 나가셔서 창업 준비를 하셨다. 퇴사를 하고 1년이 조금 넘은 뒤 부모님은 함께 음식점을 차렸다. 지하 1층이었다. 처음엔 습하고 어두컴컴해서 무서웠는데 인테리어를 하고 나니 나름 괜찮았다. 공사가 끝나던 날 우리 가족은 이불을 가지고 음식점으로 갔다. 몇 시간 동안 이곳저곳 꼼꼼히 쓸고 닦았다. 그리고 식당 한구석에 이불을 깔고 다 함께 누웠다. “우리 앞으로 잘살아 보자.” 어머니가 말했다.
요즘에는 쉐프들이 많이 활동해서 그나마 음식점에 대한 인상이 좋아졌다지만 한국에서 음식점을 한다는 건 여전히 존경받는 일은 아니다. 십여 년 전엔 더 심했다. 평소엔 예의를 차리지만, 조금이라도 화가 나면 “음식점이나 하는 주제에”라며 깔 보이기 십상이었다. 어머니도 그런 깔봄과 무시를 많이 당했다. 그럴 때마다 때로는 소리를 지르셨고, 때로는 우셨다. 하지만 절대 포기하진 않았다. “후우우” 깊은숨을 내쉬고 다시 카운터로 나가셨다.
음식점을 차린 지도 벌써 25년이 됐다. 그동안 우리 남매는 모두 결혼을 했다. 부모님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셨고 용돈을 챙겨줘야 할 손자 손녀도 많이 생겼다. 참 많은 것이 변했지만 여전히 그대로인 것도 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어머니는 여전히 “후우우”하고 깊은숨을 내쉰다. 그리고 정면 돌파를 하신다. 결코 도망치는 법이 없으시다. 오진이긴 했지만, 암일 수도 있다는 의사소견을 받고 오신 날도 그랬다. “후우우” 깊은숨을 내쉬면서 말씀하셨다. 평소처럼 하면 된다고. 잘 먹고 즐거운 생각만 하면서. 만에 하나 때가 됐으면 순리대로 가면 되는 거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어떤 한숨엔 고민과 걱정이 섞여 있다. 불가능과 좌절이 녹아있다. 그런 한숨을 들으면 함께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도망치고 싶다. 반면 어떤 한숨은 전쟁에 나서는 무인의 그것과 같다. 비장하지만 두려움은 없다. 고통은 있어도 불가능은 없다. 그런 한숨은 희망 없는 세상에 한 줄기 튼튼한 동아줄과도 같다. 왠지 모르게 의지가 되고 힘이 솟는다. 어머니의 한숨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