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나를 장손이라며 유난히 예뻐하셨다. 어릴 적에 할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난 늘 할아버지 무릎 위에 올라가 있었다. 듣자 하니 난 할아버지 얼굴에 ‘퉤’하고 침을 뱉곤 했단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기억도 안 난다. 아무리 아이라도 그런 행동은 한 번쯤 혼내실 법도 할 텐데 할아버지는 그런 행동마저 예뻐하셨단다.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는 냇가에서 주먹만 한 개구리를 잡아 오셨다. 개구리 튀김을 해주시려고 그러셨다. 내 기억에 개구리는 아무리 커도 먹을 부분은 많지 않았다. 일단 얼굴은 징그러워서 못 먹었고, 배도 그 안에 거무튀튀한 내장 때문에 또 먹지 못했다. 그나마 살이 좀 붙어 있는 뒷다리가 먹을 만했다. 닭고기처럼 개구리도 뒷다리가 핵심인 셈이다. 그 귀한 뒷다리는 늘 내 차지였다.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이 참 대단하긴 했다.
한번은 저녁에 다 함께 차를 타고 시내로 향한 적이 있다. 할아버지는 운전석 옆자리에 앉으셨고 나는 할아버지 무릎 위에 있었다. 당시 시골길은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칠흑이었다. 별 보기엔 좋았지만 이동하기엔 위험천만했다. 갑자기 코너에서 집채만 한 덤프트럭이 불쑥 튀어나왔다. 중앙선을 아슬아슬하게 밟으면서 기세등등하게 달려오던 트럭. 아버지는 급하게 핸들을 꺾어 오른편으로 바짝 붙었고 간신히 트럭을 피했다. 안도의 한숨을 채 쉬기도 전에 우리 차는 그만 논두렁에 빠지고 말았다.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있던 나는 차가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할아버지는 나를 꼭 잡고 놓지 않으셨다. 오히려 당신 몸은 신경 쓰지도 않으시고 우리 손주 다친 데 없냐며 내 몸부터 살피셨다.
이 외에도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몇 개 더 있긴 한데 많지는 않다. 사춘기에 접어든 후로는 시골을 잘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 년에 많아야 한두 번 명절 때 어색하게 인사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추억은 언제든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추억은 언제든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출처: 픽사베이)
어학연수를 떠나기 전, 실로 오랜만에 할아버지 댁에 갔다. 세월에 장사 없다고 했던가. 그토록 건강하시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껏 작아진 모습으로 병상에 누워계셨다. “할아버지, 저 잠깐 미국 다녀올게요. 다녀와서 다시 인사드리러 올게요. 그동안 건강하셔야 해요.” “뭐? 누구?” 치매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할아버지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드렸다. 5개월 후, 꿈에 할아버지가 나왔다. 어느 병원이었던 것 같다. 처음 보는 곳인데도 꿈속의 나는 아주 익숙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속옷 갈아드릴게요. 잠깐 엉덩이 들어보세요.”
별말씀이 없으셨다. 표정을 보니 손주의 도움을 받는 게 싫으셨나 보다. 손 등을 밖으로 향한 채 몇 번 휙휙 내저으셨다. 저리 가라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 갈아드리겠다고. 몇 번의 실랑이가 오갔고 할아버지는 이내 돌아누우셨다. ‘눈 딱 감고 엉덩이만 조금 드시면 금방 갈아 드릴 텐데. 하여간 고집하시고는’ 실랑이는 관두고 대신 조용히 찬송가를 불러드렸다. 몇 곡이나 불렀을까. 할아버지는 주무시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어 조심스럽게 속옷을 갈아드렸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별일이다. 생전 꿔보지 않은 할아버지 꿈을 꾸다니. 혹시나 해서 아버지께 전화했다.
“할아버지가 꿈에 나오셨네. 별일 없으시죠?”
“그래? 딱히 큰일은 없다. 공부는 좀 할 만하니?”
“뭐 똑같죠. 생각보다 금방 적응했어요.”
그간의 안부를 더 묻고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이틀 후. 샤워하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치형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언제요?”
“오늘 새벽에. 장례식에 올 수 있을까?”
“가야죠.”
두근두근. 격렬한 운동을 한 것처럼 심장이 요동쳤다. 돌아가시기 전에 부모님이 꿈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믿진 않았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내 꿈에 오셨다. 마지막으로 손자 얼굴 한 번 더 보시려고. 어른이 된 이후로 처음 남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속상했다. 무엇보다 슬펐다. 비행기 표를 끊고 다음 날 바로 한국으로 출발했다. 기숙사에서 장례식장까지 정확히 28시간 걸렸다. 그나마 발인 때 영정사진을 들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사고가 났을 때 당신보다 품 안에 있던 나를 먼저 챙기셨던 할아버지를 나는 그렇게 떠나보냈다. 운구행렬의 가장 앞자리에서 영정사진을 품 안에 꼭 안고 걸으면서 생각했다. 꿈꾼 다음날 할아버지에게 전화 한 통 드렸다면 어땠을까. 손주 목소리 한 번 더 들려 드렸다면. 때 지난 후회는 소용없다는 걸 잘 알지만 나는 한참 동안 자책감에 시달렸다.
할머니의 숨은 평소와 달랐다 (출처: 픽사베이)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나는 직장인이 되었다.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 팀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그날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회사니? 할머니가 위독하시단다.” 순간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이번에도 임종을 지키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당장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차를 뺐다. 달린다고 달렸는데도 50분이나 걸려 겨우 보훈병원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가 없어서 계단을 뛰어올랐다. 할머니는 중환자실 한구석에 계셨다.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온몸에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생명이위태롭게 흔들렸다. 모두 울고 있었다.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아 할머니에게 이끌었다.
“어머니, 손주 왔어요.”
“할머니 저 왔어요.”
그밖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의학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할머니의 숨은 평소와 달랐다. 가팔랐고 벅차 보였다. 몸과 영혼이 분리되기 일보 직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죽기 전에 잠깐 정신이 돌아오는 분도 계시다는데 그런 기적은 없었다. “하아악”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시더니 이내 잠잠해지셨다. 의료진이 급하게 심장충격기를 가슴에 대고 전원을 틀었다. ‘덜커덕’ 한 번 더. ‘덜커덕’ 금방이라도 기침을 하고 일어나실 듯 할머니의 몸이 요동쳤다.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심장 박동은 하릴없이 뚝뚝 떨어져 내려 이내 “띠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0’을 가리켰다. 그게 끝이었다. 한 사람의 딸이자, 부인이자, 어머니이자, 할머니였던 한 여인. 그 위대한 삶의 여정이 촛불이 꺼지듯 순식간에 내 눈앞에서 끝나버렸다. 고통스러우셨는지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할머니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미처 못 해 드린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 혹시 누가 예수님 아냐고 물어보면 꼭 아신다고 하세요. 어디서 들었냐고 하면 손주가 얘기해 줬다고요. 꼭 말씀하셔야 해요. 모른다고 하시면 안 돼요.”
들으셨을까? 엷은 미소라도 보여 주셨다면 좋았으련만. 그동안 많은 장례식에 참석해봤다. 하지만 소중한 이가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숨을 쉬고 계셨는데. 살고 죽는 게 이렇게 간단했던가. 많은 자손이 아무리 간절하게 바라도, 값비싼 의료 시설에 둘러싸여도, 떠나는 숨 하나 붙잡질 못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임종을 지키지 못해 자책감이 컸다. 반면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었기에 자책감이 크진 않았다. 대신 허무했다. 한평생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셨는데 정작 그 아이들은 마지막 순간에 우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허무했다. 살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하셨을 텐데 정작 마지막 순간에는 당신의 인생에 한마디 평도 남기지 못하시는 모습에 허무했다. 나의 마지막도 이와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에 허무해졌다.
삼일장을 마치고 할머니는 다시 할아버지 곁에 나란히 누우셨다. 인부들의 감쪽같은 솜씨에 봉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원상복구 됐다. 멀리서 온 친척들도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매지 않는 까만 넥타이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해가 졌다. 그리고 해가 떴다. 한동안 쓸쓸했던 길거리가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찼다. 통근길 지하철은 여전히 비좁았고, 사무실에 도착해 메일을 열어보니 해야 할 일도 그대로였다. 늘 하던 대로 고객사를 방문했다. 저녁이면 함께 치킨에 맥주를 마셨다. 출근 시간도, 채워야 할 실적도 변함이 없었다. 우주와 같다는 한 사람의 인생이 사라졌는데 세상은 잘만 돌아갔다. 마치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렇다고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만은 아니었다. 밖에서 보이진 않지만 사소한 변화가 있었다. 사랑하는 두 분과의 이별은 내 마음에 작은 생채기를 냈다. 그곳에서 전에 없던 허무가 자라났다. 생각했다. 숨은 어떤 모양으로든 자책과 허무를 남기기 마련이라고. 따라서 숨을 쉰다는 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한동안 나는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