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고'와 '강제'의 완급조절
“아빠, 이건 깔아도 돼?” 딸이 패드를 내밀며 묻습니다. 게임 앱 하나를 깔고 싶은가 봅니다. 저희 집은 게임과 관련해 몇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딱 정해놓은 건 아니었습니다.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나씩 만들어졌죠. 그중 하나는 이용 시간입니다. 주당 총 2시간의 범위 안에서 나눠 쓸 수 있으며, 학기 중에는 금, 토, 일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규칙은 앱 설치 개수 제한입니다. 총 5개의 게임 앱만 깔 수 있고, 새로운 게임을 설치하려면 기존 앱 중 하나를 삭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게임은 패드에만 설치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때 사준 스마트폰에는 게임을 깔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게임을 깔기 전에 반드시 아빠에게 보여줘서 확인을 받아야 한다'는 규칙도 있습니다.
제가 확인하는 항목은 주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 개발사와 퍼블리셔(게임 유통사)를 살펴봅니다. 생소하거나 신뢰하기 어려운 곳이 아닌지 확인하는 수준입니다. 둘째, 인앱 결제 여부와 광고 관련 사항입니다. 셋째, 이용 등급과 내용정보 (선정, 폭력, 공포, 부적절한 언어, 약물, 범죄, 사행)입니다. 전체이용가인지, 12세 이용가라면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봅니다.
딸이 새로운 게임을 깔고 싶어 하는 경우는 대개 친구나 언니들과 즐겁게 놀고 온 다음입니다. 함께 재밌게 놀았던 게임이니만큼 집에 돌아온 후에도 그 재미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크겠죠. 특히 자기 순서를 기다리며 마음껏 못 했던 아쉬움이 남았을 테니, 그 마음을 더는 누를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딸이 어떤 게임을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대부분은 패드로 하는 무료 게임입니다. 무료이기에 인앱 결제와 광고가 있는 건 당연합니다. 앱 설치 비용이 없으니 다른 걸로 수익을 내야 하니까요. 인앱결제나 광고에 대한 제 기준은 이렇습니다. 플레이를 위해 반드시 무언가를 사야 한다면 탈락입니다. 일단 허락하더라도 딸의 플레이 장면을 좀 지켜봅니다. 광고가 지나치게 많으면 탈락 대상입니다. 마지막으로 광고가 제 딸이 봤을 때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이면 바로 탈락입니다. 남은 건 이제 하나입니다. 바로 ‘콘텐트가 적절한가’입니다.
이 부분은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OTT 영화 고르듯, 화면에 연령 등급과 내용 정보가 표시되어 있으니까요. 각 가정마다 콘텐트에 대한 기준이 다를 수 있으니 선택은 자유입니다. 중요한 건 ‘알고 선택하는가’겠죠. 제 경우 전체 이용가는 거의 자동통과입니다. 현재 기준에서 문제는 12세 이용가입니다. 이때는 포함된 내용 정보를 꼼꼼히 살펴보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딸이 아직 초등학생이라 15세 이상 이용가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실 딸도 15세 이상 등급 앱은 아예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딸이 점점 자라면, 그때는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요? 그때도 제가 판단하는 게 맞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딸과의 거리는 더 멀어지지 않을까요? 그럼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까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등급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특히 12세 이용가와 15세 이용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모든 콘텐트에는 등급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게임을 출시하려면 반드시 사전에 등급을 받아야 합니다. 등급을 받지 않은 게임이 유통되면 법적으로 처벌받죠. 같은 게임이라도 서비스 플랫폼(모바일, PC, 콘솔)에 따라 등급 심사 과정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기본 원칙은 같습니다.
등급은 보통 나이에 맞춰 나누어집니다. 다만 국가별로 기준이 조금씩 다르며, 법으로 강제하는 경우도 있고 자율에 맡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율처럼 보여도 사실상 강제인 경우도 많죠. 예를 들어 일본은 청소년 이용불가 등급의 콘솔 게임 패키지를 유통하려면 CERO 등급을 받아야 합니다. 안 받으면 유통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판매점에서 받아주질 않거든요. 어떤 나라들은 강제와 자율을 섞어 운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등급 체계에 익숙합니다. 영화나 OTT(넷플릭스 등)를 볼 때마다 나이 제한과 내용 정보를 확인하니까요. 우리나라는 콘텐트 종류와 무관하게 4개 등급과 7개 내용 정보로 구분합니다. 성인이 된 지 20년도 더 된 제 경우는 더 이상 이런 등급에 큰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전 이미 어른이니까요. 뭐든지 선택할 수 있는데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제 일과 관련돼 있으니 업무 관점에서 볼 뿐입니다. 하지만 딸이 자라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딸은 아직 어립니다. 아직 어린 딸은 원하는 모든 콘텐트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딸과 저는 등급과 관련해 어떤 대화를 해야 할까요?
플랫폼별로 다르긴 해도 등급 기준은 동일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시장이 급성장하며 현실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게임은 쏟아지는데 한 기관에서 모두 검토하기 어려웠던 거죠. 그래서 법률에 따라 자율 등급 심의가 도입됐습니다. 이로 인해 날개를 단 곳이 있습니다. 바로 모바일 게임입니다.
현행법상 청소년 이용불가 등급을 제외한 모바일 게임은 자율 등급 심의로 유통됩니다. 게임사가 플랫폼(구글플레이, 애플 앱스토어, 원스토어 등)에 등급을 신청하고, 설문 방식에 따라 직접 항목을 선택하면 빠른 시일 내 등급이 결정됩니다. ‘거짓으로 답하면 어떡하냐’는 걱정도 있겠지만, 두 가지 안전장치가 있습니다. 먼저 플랫폼이 신청 내용을 검토합니다. 제대로 이뤄졌는지 시스템적으로 확인합니다. 문제없이 출시되더라도 정부기관인 게임물관리위원회가 사후 관리를 진행합니다. 자체 모니터링과 민원 접수를 통해 문제가 있으면 해당 플랫폼과 개발사(혹은 유통사)에 재검토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문제는 발생합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면 기준에 대한 이해가 달랐든 보는 이에 따라 등급에 대해 갸웃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등급을 높게 매기는 건 보통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건 그냥 전체이용가로 해도 될 것 같은데 왜 12세일까라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동을 보호한다는 입장으로 보면 문제시할 이유를 찾기 어렵습니다. 또 전체이용가나 12세 이용가가 콘텐트 측면에서 그리 차이가 나지도 않습니다. 그럼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청소년이용불가에 더 가까울 것 같은데 15세 이용가로 신청해 등급을 받아 서비스하는 경우 말이죠. 등급분류를 신청해 온 제 경험상 12세 이용가 까지는 누가 보더라도 이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경계에 걸려있는 15세 이용가의 경우는 뭔가 좀 애매한 경우가 있습니다. 등급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는 기준과 맥락을 이해하고 내부에 설명을 해줍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시원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기준에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경계에 서 있는 건 늘 애매합니다.
사람들은 구속받는 걸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상황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전쟁이나 전염병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국가의 구속을 받아들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딸도 부모의 구속을 아직까지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직 미성년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만약 제가 이런 상황을 이용해 계속해서 딸을 구속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김영민 교수는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에서 현실 속에서 국가는 자주 실패한다고 합니다. 사람을 강제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깐요. 아래는 그가 책에서 묘사한 강압하는 국가에 대한 피지배층의 구체적인 저항에 대한 내용입니다.
“대규모 반란군을 진압한 국가는 종종 마이클 콜레오네처럼 개폼을 잡지만, 피지배층은 미시적인 저항을 통해 결국 국가를 곤경에 빠뜨린다. 정치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의 연구에 따르면, 피지배층은 지연 전술, 은근한 의무 불이행, 좀도둑질,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공유지 무단 점유, 험담, 경멸적 침묵 등 각종 미시적 수단을 통해 국가에 저항한다. 국가가 실패하는 것은 꼭 조직화된 대규모 투쟁이나 영웅적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미시적인 투쟁 속에서, 국가 권력은 잠식된다. (p165)”
내용은 분명 억압하는 국가와 저항하는 피지배층에 대한 건데, 제게는 이상하게도 억압하는 부모와 저항하는 청소년으로 봐도 전혀 이질감이 없어 보입니다. 딸이 커가며 저희는 자율과 강제의 비율이 엇비슷해지는 경계선에 서게 되는 순간이 올 겁니다. 저는 위에서 묘사한 국가와 같이 실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답을 찾는 여정을 떠나게 될 겁니다. 어떻게 결론을 낼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국가가 정해놓은 콘텐트 등급에만 맞춰 칼같이 자르지는 않을 거란 점입니다. 즉, 딸과 저는 저희만의 답을 찾을 거라는 점입니다.
혹시 현재 답을 찾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한 가지 소개해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그건 바로 호주 사례인데요. 호주는 재작년 10월 컴퓨터게임(i.e. 온라인게임)에 대한 등급분류 가이드라인을 업데이트했습니다. 그걸 확인하는 과정에서야 알게 됐죠. 호주의 경우 제가 고민했던 이 15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고 있다는 것을요. 같은 15세이지만 등급을 두 개로 나누는 방법으로 말이죠. 하나는 '권고'로 다른 하나는 '법적제한'으로 구분 지어 놓았습니다. 이들도 특별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전체이용가나 12세 이용가 정도에 대해서는 그냥 부모의 가이드에 맡깁니다. 하지만 그 중간에 애매하게 존재하는 15세 이용가가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성인이용가에 가까울 수 있는 것들도 있다는 점을 인식한 것 같거든요.
이런 질문을 통해 익숙한 것을 다른 시선에서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딸도 커가지만 저도 커가는 과정이겠죠. 앞으로 '온라인게임' 뿐만 아니라 다른 놀이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가 올 거라 믿습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건 '권고'와 '강제'의 완급조절일 테고요. 물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서로 간에 대화일 거라 믿습니다.
<Guideline for the Classification of Computer Games 2023, released on Oct.24, 2023>
G (General)
PG (Parent Guidance)
M (Mature) >> 15세 미만인 자들에게 추천하지 않는다고 할 뿐이다
MA 15+ (Mature Accompanied) >> 15세 미만인 자들에게 적합하지 않고, 법적으로 제한된다고 명시
R 18+ (Restricted) >> 법적으로 성인들에게만 허용된다고 명시
RC (Refused Classific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