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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지만 잠시 나이 확인 하겠습니다

직접 입력 vs 제삼자를 통한 인증

by 이싸라

모든 게 다 때가 있다고 합니다. 공부도, 노는 것도, 심지어 결혼도 말이죠. 대체로 어른들의 잔소리로 들릴 때가 많습니다만, 사실 그 시기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기도 합니다. 김영민은 '한국이란 무엇인가'에서 어떤 일들은 그 시절에 하지 않으면 영영 할 수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가령 고시 공부를 위해 연애를 90세 이후로 미루는 청년 같은 예를 들어 말이죠.

하지만 보통은 이 '때'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이유를 들을 기회는 좀처럼 없습니다. 하물며 '언제'라는 숫자로도 볼 일이 잘 없습니다. 특히 하기 싫은 데 해야 할 때가 그런 것 같습니다. 하기 싫을 때 이 얘기를 들으면 이 '때'가 어느 순간부터 클리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때는 보통 늦게 해서 문제입니다. "공부해라", "나갔다 들어오면 얼른 씻어라", "숙제 안 하니?" 이러 얘길 부모님에게 들으면 보통 이런 반항을 합니다. "왜 꼭 지금 해야 돼? 나중에 하면 안 돼?"


근데 가끔씩 이 '때'를 객관화된 숫자로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재밌는 걸 할 때입니다. 이때는 반대로 빨리 해서 문제죠.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술을 마실 때가 그렇습니다. 강력하게 나이 제한이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나이를 넘으면 환호합니다. 술을 잘 마시든 아니든, 좋아하든 아니든 환호합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죠. 시원하게 헐벗은 또는 피가 온 사방에 튀는 영화를 보려면 특정한 나이를 넘겨야 합니다. 이제는 맛집인지 놀이터인지 구분이 모호한 PC방도 그렇습니다. 저녁 10시가 넘으면 청소년은 출입을 못합니다. 방과 후 혹은 주말, 친구들과 미친 듯이 즐기던 롤(LoL)과 배그, 발로란트는 아쉽지만 PC방에선 10시까지 밖에 허용되지 않습니다. 신데렐라가 마법이 풀리기 2시간 전에 청소년은 이제 그만 일어서야 합니다.



뭉뚱그려 얘기하면 이런저런 콘텐트를 즐기려면 그 나이가 돼야 합니다.


그러니 이런저런 놀이 앞에서 저희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몇 살이세요?" 특히 법에서 정한 특정한 콘텐트의 경우는 더욱 엄격합니다. 대충 지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자기들이 요구한 방법에 맞춰 나이를 확인시켜 줘야 합니다.


오프라인에서의 나이 확인은 단순합니다. 단 한 가지죠.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앳된 모습의 젊은 친구들이 맥주나 소주를 사려면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면 됩니다. 점원은 자기 앞의 인물과 사진 속 인물이 동일한지 눈으로 스캔합니다. 사진 속 얼굴과 실물을 확인하고 생년월일까지 확인하면 끝입니다. 간혹 갑자기 변한 외모 때문에 상대방을 갸우뚱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만, 이건 다른 경우이니 귀엽게 넘어가겠습니다. 물론 속이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간단합니다. 온라인은 어떨까요? 서로를 볼 수 없는 온라인에선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당신의 얘기를 믿든지 혹은 국가가 지정한 수단을 통한 인증을 믿든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저희는 후자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온라인은 일상입니다. 그래서 저흰 이 인증에 너무 익숙합니다. 뭔가 하려면 핸드폰을 꺼내 본인인증을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정부가 정한 수단을 통한 인증만 인정합니다. 하지만 눈을 다른 나라로 돌리면 다른 방법으로 이뤄지는 곳이 상당수 있습니다. 앞서 애기한 당신의 얘기를 믿는 방법으로 말이죠. 즉, 당신이 몇 살이라고 입력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인증(Age-verification thru authentication)과 스스로 입력(Age gating by self-declaration)이라니. 둘은 뭔가 극과 극처럼 보입니다. 왠지 다른 나라의 믿음을 근거로 한 시스템이 막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냥 부러워하기도 그렇습니다. 속이는 사람이 꽤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에요. 속이고 들어가면 다 볼 수 있는데 마냥 부러워하기도 그렇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시스템은 있습니다. 속이고 들어가는 것 때문에 발생하는 책임은 오롯이 본인 몫이거든요. 하지만 구멍이 커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그에 반해 저희는 견고해 보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이 견고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듭니다. 연령을 확인하기 위해 건당 인증 비용이 발생합니다. 이 비용은 이용자가 아닌 제공자가 부담합니다. 결국 이 비용은 돌고 돌아 다른 방식으로 이용자에게도 전가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사실 구멍이 있습니다. 본인인증이 이뤄지는 핸드폰이 부모님 명의라면 인증이 소용없습니다.


예전 싱가포르 정부기관 분들과 회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미션은 모바일게임을 대상으로 청소년을 보호하는 시스템 구축이었습니다. 그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나라의 사례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미팅이 가능했던 개별 회사 혹은 기관들과 만나며 그들은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하나는 문서로 된 기준이었습니다. 법과 시행령 그리고 그 밑의 가이드라인 등 명확한 기준에 대해 물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것이 실제로 적용되는 사례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실제로는 어떤지 혹시 현행 규제로는 막지 못하는 경우는 없는지 등도 물었습니다.


이들과의 미팅 과정에서 나이 인증 등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였습니다. 자연스레 우리나라는 상당히 강력한 나이인증 체계를 갖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 PC온라인 게임의 계정을 만들 때는 반드시 본인인증을 거쳐야 합니다. 또, 모바일 게임의 경우에도 청소년이용불가 게임을 하려고 할 때는 플랫폼(앱스토어, 구글플레이 등)에서 본인인증을 거쳐야 합니다. 이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상대 쪽에서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근데 그 핸드폰이 자기 거라는 건 어떻게 확인해요? 부모님 거일 수도 일수도 있잖아요? 돈을 벌지 않는 학생들에게 부모님이 사주는 게 일반적이고 명의를 부모님으로 할 수도 있을 텐데 말에요."


그 순간 숨기고 싶은 걸 들킨 기분이 들었습니다. 맞는 말이거든요. 배려가 몸에 밴 그들은 제 반응을 보고 한 발짝 물러섭니다. 자연스레 남은 이슈들로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그렇게 약속된 시간이 지나 그들과 미팅은 끝났습니다. 근데 위 질문이 계속 제 머리를 맴돕니다. 많은 사회적 비용을 들여 유지 및 적용을 하고 있는 이 핸드폰 인증이란 것도 어쩌면 형태를 달리 한 trust-based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둘의 차이가 어쩌면 그저 '처음부터 믿는 거냐' 아니면 '중간부터 믿는 거냐'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말에요.



한국의 경우 온라인에서 나이 확인은 핸드폰 본인 인증이 사실상 유일합니다.


모바일 게임을 주로 서비스하는 회사의 경우 청소년의 지나친 결제와 관련된 민원을 받을 때가 간혹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환불이 되지 않는데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미성년 자녀가 부모 명의 휴대전화나 앱마켓 계정으로 결제했기 때문입니다. 게임사 입장에선 핸드폰 본인인증이 성인으로 처리되는 마당에 믿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럼 이걸 막을 방법은 없냐고요? 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쉽습니다. 자녀가 쓰는 핸드폰은 자녀의 명의로 개통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가입할 때 필요서류 역시 간략합니다. 가족관계증명서 정도뿐입니다. 약간의 허들만 넘어가면 자녀의 진짜 나이로 보호(혹은 제약)가 가능합니다. 그럼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부분이 해결됩니다. 가령 PC온라인게임 사이트는 가입 시 기본적으로 본인인증을 요구합니다. 이때 청소년(19세 미만)으로 확인되면 곧바로 부모님 동의를 거칩니다. 모바일의 경우 가입단계에서는 본인인증을 요구하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청소년이 결제를 원할 경우 게임사는 부모님의 동의를 요구합니다. 동의를 받지 않고 결제하면 게임사의 잘못입니다. 즉, 청소년이 보호자 동의 없이 콘텐트를 구입한 경우 환불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딸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는 시점에 약속을 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스마트폰을 사주겠다고 말이죠. 주변의 친구들 98%가 갖고 있는 스마트폰인데 저희 부부는 "아직은 안돼"라며 외면했습니다. 친구들과 연락이 필요하면 저희 핸드폰을 건넸고 생각보다 딸은 얌전했습니다. 저희 부부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빨리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딸에게 말합니다. "딸, 이제부터 스마트폰을 주려고 하는데, 한 가지 얘기할 게 있어". 딸은 이게 웬 횡잰가 싶어 빨리 말하라고 성화입니다. "이 스마트폰은 딸의 이름으로 등록할 거야. 그래서 앞으로 사이트에 가입하거나 뭔가 인증을 해야 할 땐 딸 이름으로 이뤄질 거야. 그러니 소중하게 다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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