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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의 숲 May 02. 2021

수술 전 날, 나는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이해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발이 마비가 된 것조차 몇 년 동안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둔했던 내가 사랑이란 감정을 쉽게 느낄 리 만무했다. 누구와 사귀어도 미지근했고 나를 사귀었던 남자 친구들은 좁히지 못하는 거리감에 모두 힘들어했다. 그러면서 나는 내심 불타는 사랑이 뭘까 궁금했다. 연인의 바짓자락을 잡으며 가지 말라고 붙잡는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큰 사랑과 감정을 느끼기에 저리도 간절할까. 아파도 좋으니 한 번만 느껴보고 싶다.... 고 하던 중 상대를 제대로 만났다. 


타주 공군기지에서 근무하던 키는 183cm에 뚜렷한 이목구비와 매일 세 시간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를 가진 오빠가 우리 동네에 나타난 것이다. 건장한 백인들 틈에서도 등장만으로 시선을 끄는 그런 오빠였다. 그렇지만 자기가 잘생긴 걸 아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 내 눈에는 거만해 보여 나는 괜스레 너에게 관심 없다 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눈길 주지 않으려 노력했고 일부러 더 투덜대었다. (생각해보면 이때부터 나는 오빠를 좋아했던 게 분명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번은 누군가 오빠에게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뭐 센 척하면서 액션 영화나 좋아한다 하겠지 라는 삐딱한 마음으로 오빠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오빠는 "노팅힐이요" 하며 수줍게 대답했다. 


너무나도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는 웃음을 뿜었고 오빠는 왜 웃냐고 나무랐다. 그저 무뚝뚝하고 거만해 보이는 얼굴 뒤에 여리고 소녀 같은 감성이 숨어있는 매력에 나는 마음이 열렸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제대 후, 곧 대학교로 돌아가야 했던 오빠는 그 학기를 휴학한 후 나와 연애하는데 전념했고 나도 그렇게 목을 매던 회사일을 난생처음으로 대충대충 하며 살아보았다. 롱디가 되었을 때도 핸드폰에 있는 사진으론 부족해 같이 찍은 사진을 인화하여 액자에 담아 서로 어디든 들고 다니던 요란스럽고 유치했지만 나에겐 전부인 것 같았던 사랑을 했다.


종양 선고를 받던 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생각나는 건 단연 오빠였다. 정말 너무 두려웠지만 오빠가 옆에서 이 여정을 함께해주면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 나 종양이래"라고 시작해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마침 미국에서 학교로 돌아가 공부하던 오빠의 방학기간이었고 나는 한국으로 와줄 수는 없겠냐고 물었다. 침묵이 흘렀고 오빠는 재정이 좋지 않아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비행기 티켓을 우리가 내주겠다고 했으나 오빠는 계속해서 거절했다. 오빠가 원망스러웠던 나와 답답했던 오빠의 갈등은 고조되었고 결국 오빠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넌 정말 이기적이야."


순간 머리를 띵 맞은 기분이었다. 물론 나도 아픈 말들을 내뱉었겠지. 나는 미처 생각지 못한 그만의 사정이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종양 선고를 받은 상태였고 수술을 한다고 해도 마비된 발은 돌아올 수 없다는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다른 날도 아니고 그런 날, 내가 지난 2년 반 동안 사랑하고 가장 기대었던 누군가에게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새하얘지는 머릿속이란 지금도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그 후, 몇 주 동안 수술 전날이 되었을 때 까지도 오빠는 나에게 전화 한 번이 없었다. 


내가 그렇게 무리한 부탁을 했었던 걸까.


어떤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었더란다.

이해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도 그만의 이야기가 있었겠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해하고 용서해보려는 중이다. 


그렇지만 용서는 너무 어려워서 일까

십 센티짜리 수술 자국은 딱지가 앉아 흉터로 남았지만

그 기억은 흉도 지지 않는, 만질 때마다 매번 아린, 그런 상처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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