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순대국 버디'인 그녀는 얼마전 병천 청화집을 다녀왔노라 자랑했다. 순대가 어쩜 그리 맛있을 수 있냐며, 양도 푸짐하고 괜히 병천순대가 아니더라며 감탄을 거듭해서 지역주민 출신으로서 어깨가 으쓱해졌다.
서울역 근처에서 근무하는 그녀와 종각역에 있는 직장에 다니는 나의 중간지점에 기가 막히게도 백암농민순대가 있다. 우리는 각자의 직장에서 출발해서 20여분을 걸어 북창동 골목에 있는 순대국집에서 만났다. 줄은 이미 길어 30분은 기다려야 했다. 왜 여기를 줄 서서 먹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누군가 혼잣말인듯 들으라는 소리인 듯 중얼거리며 지나갔다. 이해못하시는 당신이 참 안되었구려. 나도 소심하게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우리는 기다리면서 그간의 안부를 나누었다. 일 얘기며 가족 얘기, 얼마전 부친상을 당했던 친구는 잘 지내는지, 최근에 다녀온 젊은 동료의 모친상에서 느낀 얘기며, 그리고 중환자실에 계신 어머니 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 없는 다른 친구까지.. 이상하게 그 저녁에 우리는 삶보다 가까운 죽음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누었다. 새싹이 어여쁜 연두색을 마른 나뭇가지에서 밀어올리는 봄날 저녁에 어울리지 않는 주제로군,,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군청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저녁 어스름 속에 거리의 네온사인이 더욱 밝게 빛나는 것이 슬펐다.
대화의 주제는 흘러흘러 얼마전 방영한 안락사 다큐멘터리까지 이르렀다. 외국인에게도 안락사를 허용하는 스위스까지 가서 마취제 밸브를 스스로 올렸던 한국인들이 있다고 했다. 스위스의 안락사 기준은 매우 엄격해서 sound mind 상태인 사람만이 신청할 수 있다고 했다. 반면, 캐나다의 안락사 기준은 보다 급진적이어서 장애인 & 정신질환자까지 자신의 결정으로 안락사를 신청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수용하는 중인 듯 했다. 한국에서는 안락사가 제도적으로 적용된다면,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현대판 고려장' 또는 '현대판 아우슈비츠'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다큐멘터리에서는 염려의 목소리를 제시했다. 너무 빠르다고, 안락사를 받아들이기 전에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제도화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고, 한 카톨릭 신부님이 또렷이 짚어냈다. 인간은, 사람의 아들은 과연 스스로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죽음의 '자기 결정'에 대해 한참 토론했다. 이제 주변은 완전히 어둡고, 더욱 밝아진 간판들 사이로 왁자지껄 술자리의 소음이 흘러다녔다.
우리는 창가의 탁자에 앉아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가 민망할 만큼 후딱 서빙되는 순대국을 각자의 앞에 받았다. 이 집은 걸쭉하고 얼큰한 국물이 특징이고, 아주 곱게 빻은 들깨가루를 두어 숟가락 넣어 더욱 걸쭉하게 만들어 먹어야 한다. 부추를 넣어 국물에 뒤적인 후 밥을 조금 말아 떠먹으면, 부추향이 밴 얼큰하고 따끈한 국물에 속이 화악 풀린다.
국물이 개성있고 얼큰한 맛이 강렬한 반면 고기는 씹지 않아도 될 만큼 푸욱 익어 부드럽다. 감칠맛 넘치는 순대와 신선한 고기의 맛을 강조하는 집의 순대국이 흰 사골국물이거나 투명한 곰탕 스타일인 것과는 정반대이다. 아니, 어쩌면 같다. 한쪽이 강하고 한쪽은 부드러워 국밥 한 그룻 안에서도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는 건, 얼마나 지혜롭고 아름다운지.
식사 전에는 그리 열띠게 토론하던 우리는 정작 국밥 앞에서는 조용히, 그러나 열심히 숟가락질하며 음식에 집중했다. 국밥 안에도 부드러움과 강함이 조화를 이루는데, 우리의 대화도 완급이 자연스레 조절되는 것이 당연하다.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차 한 잔 하자 했더니, 친구는 시간도 늦었는데 무슨 커피에 돈을 쓰냐며, 산책 삼아 더 멋진 걸 보러가자고 했다. 길 건너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걸어들어가니, 서울시립미술관 앞에 큰 횃불처럼 환히 살구나무가 꽃을 가득 피웠다. 그 어떤 네온사인보다 화려하고 환한 살구꽃. 우리는 저녁 내내 죽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삶의 반환점을 돌아서 탄생보다는 이제 죽음이 가까워지는 시간이라고 두려워했지만, 살구꽃을 보니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죽음같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저리 환한 꽃을 피우는구나. 죽음과 삶은 그저 이어져 있을 뿐 서로 멀지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