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유예가 안 된다면 귀국 유예를 택하겠습니다
티 없이 해맑던 예전의 넌 지금 어딨니
*부제는 모두 비투비의 '괜찮아요' 가사를 인용했습니다.
대학교 4학년 여름 방학, 한국에 돌아와 가족들과 저녁을 먹던 중 취업 얘기가 나왔다. ‘잠깐 한국 들어와서 머리도 식히고 새로운 곳 알아보는 게 어떻겠니?’라는 질문에 갑자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화장실에 한참을 틀어 박혀 앉아 있었는데 눈물이 나왔다. 남들 다 잘하는 취업 하나 못 해서 다 버리고 본가로 돌아오고 싶진 않았다. 열심히 살겠다며 나와의 약속까지 만들었던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꼴이 우스웠다.
딱 5년 전 오늘, 스무 살의 나는 유학 길에 오르며 ‘어쩌면 한국으로 안 돌아올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졸업 후의 모습을 상상하면 일본 회사를 다니며 경력을 쌓고 있겠구나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선배들도 졸업해서 취업 잘했고 같이 유학 온 친구들도 일본 취업을 택했다. 한국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긴 헬조선이다. 돌아올 생각하지 말아라.’라는 의견이 99.999%였다. 내가 봐도 한국은 취업난이 너무 심했다. (지금은 더 심하다.) 미세먼지와 강추위를 견디며 살 바에는 일본에서 몇 년 더 지내다 가고 싶었다.
실업자 100만 시대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 숫자가 차라리 통장 잔고였음 좋겠어
8월 14일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서로 힘든 걸 알고 있었기에 굳이 취업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훠궈와 양꼬치를 먹고 밀크티 카페에서 실컷 수다를 떨다 들어왔다. 아빠는 자고 있었고 엄마가 부엌 테이블에 앉으라고 하더니 진지하게 휴학 얘기를 꺼냈다. 기껏 친구들과의 시간을 보내며 외면하고 있었는데 다시 심란해졌다. 구 남친에게 전화를 했으나 안 받았고 잠이 안 와 새벽 5시까지 뒤척거리다 두세 시간 눈만 붙였다.
다음 날 일단 휴학은 면해야겠다는 (휴학 = 강제 귀국 행) 생각에 한국 기업도 대충 알아보겠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그렇게 넘어가는 듯했지만 부모님은 내 눈치를 보시다가 ‘그래서 일본 살면서 한국 취업 준비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라고 물으셨고 나는 대답 돌려막기로 상황 넘기기를 반복했다.
8월 23일 결국 엄마와 강남역의 모 취업 아카데미를 방문했다. 사촌 오빠가 일하는 곳이었다니. 오빠가 인사하러 오자 엄마는 반가워했지만 나는 빨리 면담을 끝내고 집으로 가고 싶단 생각밖에 안 들었다. 오빠가 건네준 이력서를 작성하고 나서 잠시 뒤 팀장님이란 분이 나오셨고, 대뜸 ‘첫째죠?’라고 물었다. 외동이니까 뭐 그런 셈이라 하자 기가 막히게 맞혔다는 표정으로 그러니까 취업이 어려운 거라 한다. 형제자매가 깔아 놓은 길이 없어서 그렇다나 뭐라나. 이때부터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타임이 시작됐다. 내가 쓴 스펙을 보더니 이 정도면 어학 괜찮고 (나도 안다) 일본 대학이면 외국계 노리는 게 좋단다 (나도 안다). 결론은 200만 원짜리 자소서, 면접 특강을 들어라였다. 에라 퉤퉤.
3년째지 어느 곳도 날 원하지 않는 삶이
일본에 남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건 자기만의 방을 갖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코웃음 칠지 몰라도, 나는 외국에서 돈 벌고 그 돈으로 먹고사는 생활에 로망이 있다. 그게 바로 독립의 정의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내가 너무 멋져 보일 것 같았다. 당시 막 사귀기 시작했던 구 남친놈도 눈에 밟혔다.
가끔 면접관은
-‘한국 SM 가시지 왜 일로 왔냐.’
-‘안 상(さん)은 외동이라 금방 귀국할 것 같다.’
-‘만약에 한국인 남자 친구가 결혼하자고 하면 귀국할 거냐.’
등의 질문을 했다. 당연히 회사 입장에서는 궁금할 수 있다. 나는 외국인 여자 문과생이기에 언제 출산 휴가를 쓸지,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버릴지 모른다. 스펙을 비교해도 일본인에 비해 특별한 게 없다. 최종 면접에서 나와 일본인이 남았다면 내가 면접관이라도 일본인을 뽑겠다. 그래도 저딴 질문으로 내가 일본에 남고 싶어 하는 의지를 테스트당한 다는 게 화가 났다. 속으로 ‘압박 면접이 이런 건가 xx’ 생각하며 진심 반, 거짓말 반 섞어 대답했지만 믿어주는 면접관은 얼마 없었다.
좌표 없는 항해 위 방황하는 작은 종이배
95년생 현역 14학번. 원래 대로라면 2018년도에 대학을 졸업하고 어딘가에 취업했어야 할 나이.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친구들 중 기졸업자는 손에 꼽힌다. 그만큼 한국 대학생의 졸업 유예나 휴학률이 높다는 소리다. 하지만 유학생에게 휴학이란 그림의 떡이다. 나라고 휴학이 싫었겠는가. 졸업과 동시에 기졸업자 딱지가 붙고 백수가 되어버리는데. 당연히 학생 신분으로 사는 기간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고 싶었다. 단지 일본 생활과 휴학을 동시에 선택할 수 없던 것뿐.
한국 대학을 다니는 한국인이 휴학을 한다고 해서 국가 체류 자격이 없어지거나 계약한 집을 빼야 하거나 하진 않다. 주위의 눈살과 잔소리를 무시할 배짱만 있으면 된다. 그렇지만 우리 유학생들은 상황이 달랐다. 휴학을 하겠다는 말은 유학생 신분을 포기하겠다는 뜻이다. 즉, 유학 비자로 얻은 중장기 체류 자격을 박탈당하며 집이나 핸드폰 등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처분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신세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남자의 경우 군대 때문에 일 년 정도 휴학하지만, 뭐 그건 예외로 하고.
그래도 부모님 말씀도 있고, 취업 아카데미 다녀오고 나서 생각하는 시늉이라도 해볼까 해서 반나절 정도 고민해봤다. ‘한국 기업을 노린다면 취업이 수월하지 않을까?’ (절대 아니다. 휴학 안 하고 이 악물고 버텨 간사이 공항에서 일한 게 진짜 잘한 짓이다.)라고 생각하며 수첩 여백에 휴학 선택 시의 기회비용을 적어 보았다. 그런데 적으면 적을수록 적자가 났다.
1. 휴학을 하려면 학교에 돈을 내야 함
2. 복학하면 학비 반액 면제를 못 받음
3. 집 처리 비용 예산 10만 엔 (이라고 썼지만 실제 경험해본 결과 2~3배 더 든다)
4. 자기만의 방이 사라짐
5. 구 남친
6. 복학해서 3학년 세미나로 가야 됨
등등 일본에 남아야 할 이유를 적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저기 적은 것들을 겪을 바에 취준으로 멘탈이 또 깨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남은 여름 방학은 마음이 무거웠지만 티 내면 한국에 남으라고 할까 봐 애써 담담한 척하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내 꿈이 멀게만 느껴질 땐 잠시 쉬다 가세요
4학년 가을 학기 개강 후 2017년 10월, 나는 또다시 취준생이 되었다. 간절했다. 마지막 학기가 지나도록 취업을 못하면 쪽팔려서 졸업식도 못 갈 것 같았다. 탁상 달력은 또다시 서류 제출 기한으로 빼곡해졌고 12월 마감인 졸업 논문과 병행하려니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구 남친이랑도 잘 안 돼갔다. 서류를 작성하려고 봤더니 일본 대학은 졸업식이 3월인 관계로 한국 기업을 17년 하반기에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8년 2월 졸업 예정자를 모신단다.) 할 수 없이 공채를 포기하고 구인 사이트에 들어가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연락 오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일본 기업 취준 할 때 서류 합격률이 80%이었던 거에 비하면 너무나도 절망스러운 수치였다.
졸업일은 다가오고 상황은 나아진 게 없었다. 그래서 최후의 보루였던 공항 지상직을 지원했다. 엄청난 하향 지원이었지만 성의 없는 이력서와 무관한 전공을 보고도 뽑아 줄까 걱정이 됐다. 기우였나 보다. 서류를 내자마자 면접 일정이 잡혔고 두 번의 화상 면접 후, 간사이 공항에서 과장님과 운항 관리 부서 관리자 두 분과의 최종 면접을 끝으로 길고 긴 취준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최종 면접이 있고 나서 며칠 뒤, 고등학교 동창들이 놀러 왔다. 3박 4일 동안 토롯코 열차도 타보고 단풍 구경도 다니며 알차게 돌아다녔다. 친구들이 돌아가고 나니 긴장이 풀려서 몸이 아파왔다. 감기약을 먹고 쓰러져 자다가 눈을 뜨니 늦은 저녁이었다. 비몽사몽 확인한 메일함에는 합격 통지 메일이 와 있었다.
-'나도 내정이란 걸 받았구나.'
기쁘기보다는 허무했고 별생각 없었다. 집에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한 뒤 면접이랴 친구들이랴 바빠서 못 봤던 구 남친 얼굴이나 보면서 합격 파티를 한 게 끝이다.
힘들어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잘 될 거예요
돌고 돌아 나는 2018년 2월 5일 모 공항 조업사에 입사, 운항 관리 부서에 배치받았다. 그리고 10월 31일 부로 퇴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9개월간의 귀국 유예 덕분에 공항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나는 단단해졌다. 적어도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면접관들 눈치 보면서 조신한 척하지 않을 깡이 생겼다. 또, 여유롭게 나를 망치지 않으면서 취업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3월이 되니 메일함은 19년도 상반기 공채 소식으로 넘쳐난다. 그동안 나는 뭘 했나. 어학 시험 도장 깨기를 하느라 바빴고 틈틈이 쓴 글을 브런치에 보냈는데 작가가 되었다. 퇴사 후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적은 게 있는 데, 지금 보니 절반도 못 이뤘다. 몇 년 전처럼 조바심 내다가 넘어지지 말고 천천히 이뤄야겠다. 직장도, 집도, 행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