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람 Apr 14. 2019

교토를 떠날 의향이 있으신가요?

교토, 마지막 파편들

나를 우울하게 했던 것


 지금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학교 4학년 시절을 웃으며 되돌아보지만 당시 나는 진지하게 모든 것을 끝내려고 했었다. 4학년 2학기가 끝날 때까지 취업이 안 되면 그냥 죽어버리고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겁게 살아 내고 있었다. 취준 스트레스, 오후 4시에 일어나 새벽 5시에 자는 불규칙적인 생활 패턴, 쿨한 척했지만 매일 마음 졸여야 했던 건강하지 않은 연애로 인한 박탈감이 나를 괴롭혔다.


 유일하게 나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12월 20일 마감이었던 졸업 논문이었다. 오후 6시쯤에 겨우 아침을 차려 먹고 수면 과다로 찌뿌둥한 뇌를 커피로 깨우며 노트북 앞에 앉아 몇 시간이고 논문 쓰기에 집중했다. 뭐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논문 쓰는 사이사이에 이력서도 냈지만 나도 이런 내가 왜 뽑혀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나를 뽑아준 회사의 요구에 응할 자신도 없었다. 그냥 최종 합격만을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그걸 위해 달려갔다.






나를 갉아먹는 연애


 4학년 봄학기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사귀기 시작한 구 남친은 가을학기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연락이 뜸해졌다. 학기 초라 바쁜 거라고 애써 자기 위로를 하며 며칠 동안 연락이 안 되거나 읽씹을 당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만나는 것도 한 달에 두어 번. 나를 갉아먹는 연애라는 것을 알았지만 헤어지게 되면 가끔이나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사라진다는 두려움에 서운한 마음을 꺼내지 못했다. 쪽팔려서 친구들에게도 이야기 못 하고 혼자 끙끙 앓다가 핸드폰 전원을 끄고 내 할 일이나 열심히 했다. 반나절 동안 꺼둔 핸드폰을 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부팅 중인 건가?’ 하고 기다려 봐도 알림은 울리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하루가 다 지나가도 고요한 방에 있는 것이 싫어 수면 유도제를 먹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괜스레 불안하고 외로운 마음을 잊기 위해 졸업 논문에만 매달렸다.






 한국 모 대기업 인적성 시험을 공부하다가 내 학습 능력의 한계를 실감하고 또다시 자괴감에 빠졌다. 수학이라는 것은 대학 입시가 끝나도 나를 괴롭힌다. 간단한 수열 문제도 못 푸는 나를 자책하며 가모가와가 보이는 스타벅스로 나갔다.


웬일로 구남친이 카톡을 보냈길래 


-‘이러이러해서 바람 쐬러 나왔다’고 하니까


-‘뭐가 그렇게 힘들어?’라고 물었다.


괜히 부담 줄까 봐 괜찮은 척하기도 지쳐서


 -‘여러 가지.’라고 대답했다.


사귄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 틀어졌던 걸까.  






 그 사이 공항 지상직으로 취업이 결정됐고 졸업 논문도 제출했다. 원하던 것을 모두 이뤘지만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못 잘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졌다. 졸업 논문 발표회가 있고 다음 날, 오사카에서 지내게 될 집을 보러 길을 나섰다. 이 날도 혼자였다. 카톡을 보내도 받지 않았다. 열차로 몇 시간을 달려 이즈미사노 역(泉佐野駅)에 도착했다. 깜깜해진 뒤라 매우 추웠는데 역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20분이 넘게 걸렸다. 국도 옆에 위치한 멘션을 지나치며 '설마 아니겠지?' 했던 건물이 내가 살 집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지린내가 진동을 했고 베란다 창문 너머로는 중국집 간판이 보였다.


오사카 집 보러 가던 날. 파견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곳 이다. 보면 아시겠지만 낡고 치안도 좋지 않다. 26.JAN.18


 대충 콘센트 위치와 구조만 파악하고 다시 교토 집으로 돌아왔다. 자정이 넘어있었는데, 구남친에게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너무나도 비참하고 보고 온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소리를 지르다가 또 수면 유도제를 먹고 누웠다.


기분은 뭣 같은데 날씨는 죽이게 좋았다. 27.JAN.18


 다음 날 구 남친에게 전화를 해서 집으로 가도 되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했다. 웬일로 따뜻한 목소리였다. 핸드폰만 챙겨서 걸어갔고 도착해서 구남친이 만든 도미탕을 먹고 낮잠을 잤다. 이사 준비 때문에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눈물이 나왔다. 한참을 품 안에서 울다가 집으로 왔다. 그게 교토를 떠나기 3일 전의 일이었고, 교토를 떠나던 날 나는 차였다.






끊고 버리고 떠난다

断捨離, 단샤리


 취업이 되든 안 되든 4년 동안 정들었던 교토 집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주기적으로 짐을 버리고 대청소를 했지만 대학 생활 내내 불어난 짐은 장난 아니었다. 특히 책과 주방 용품, 쓸데없는 잡동사니가 많았다. 당시 유튜브에서는 단샤리(미니멀리즘) 정리법이 유행이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도 하기 싫을 때는 아픈 마음도 같이 버려지길 기도하며 큰 쓰레기봉투에 안 쓰는 물건을 넣어 치워 버렸다. 쓸 만한 것은 주위에 다 나눠주고 한국으로 보낼 것들은 국제 택배로 부쳤다.


이사 준비를 하며 찍은 사진들. 마지막 두 장은 떠나는 당일 찍었다. 31.JAN.18


 4년 동안 집 꾸밀 생각만 했지 이렇게 착잡한 마음으로 집을 정리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간사이 공항에서 일하기로 결정 난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이사 준비에 들어갔다. 아깝더라도 최대한 짐을 버리고, 가구를 처리하고, 냉장고를 비웠다. 한동안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편의점 식사로 끼니를 때웠으며 매트리스를 버린 탓에 잠은 딱딱한 바닥에 담요를 깔고 자야 했다. 원래 이런 거 남의 손 안 빌리고 내 힘으로 하는 성격이지만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다는 사실은 나를 더 착잡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구 남친은 우리 집 와서 필요한 것들만 한 번 챙겨 가더니 이사 당일 우리 집으로 찾아와 헤어지자고 말한 뒤 떠났다. 차인지 30분 뒤에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초인종을 눌러서 정신없이 설명해주고 집 열쇠를 맡긴 뒤 떠난 게 교토 집에서의 마지막 순간이다. 노래 가사처럼 이별의 순간은 생각보다 훨씬 시시했다.






 주위 선배들은 취업이 돼서 이사를 갈 때 애인이나 가족이 와서 도와주고 웃으면서 떠나던데 (울더라도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난 혼자서 처리 다 하고 혼자 떠났다. 이삿짐 트럭에 같이 못 탄다고 해서 택시를 잡아 대성통곡하며 교토역으로 가서 하루카 티켓을 끊고 오사카 집으로 향했다.


 2018년 1월 31일, 교토를 떠나 오사카 집으로 이사하던 날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본인들도 교토 집보다 오사카 집이 구리다는 걸 알았겠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수분 보충만 하며 짐 정리에 돌입했다. 옵션이 에어컨과 냉장고, 간이침대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 가구는 다 인터넷에서 주문했다. 아저씨들이 떠난 뒤 아마존과 니토리에서 시킨 가구들이 배달 왔다. 가구를 조립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단순 노동을 하며 생각을 비우려고 해도 울컥 눈물이 올라왔지만 모든 짐 정리를 끝내고 새벽 1시쯤 침대에 누웠다. 육체는 죽도록 피곤한데 잠이 오질 않았다.


오사카 집에서 짐을 풀며. 저 짐을 혼자 다 정리하고 디퓨저까지 세팅 해놓고 누웠다. 31.JAN.18






 4년 동안 정들었던 교토를 떠나던 날은 이렇게 허무했다. 아무런 도움 없이 나 혼자 집을 처리하고, 남자에게 차이고, 오사카 시골집으로 이사를 갔으며 파견직으로 공항에서 일하는 하청 업자 신세가 되었다.


 이런 일들이 있고 나서 나흘 뒤 신입 사원 오리엔테이션이 이뤄졌으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마을의 좋은 점을 찾으려 노력하며 마음의 상처를 보듬었다. 완벽하게 치유되지 않아 한 달 정도는 울다가 잠들고 샤워하다가 소리 지르곤 했었다. 피폐한 정신은 개처럼 일하며 잊으려 했다. 공항 지상직으로 일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보이는 것의 5%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엄청난 시프트를 소화해야 한다. 대학 동기들이 방송국, IT 기업, 출판사에 취직해 자랑을 할 때 나는 첫 월급으로 84만 원이 찍힌 통장을 보고 또 울어야 했다.






 처음 내 손으로 정들었던 곳을 정리하고 떠나며 받았던 마음의 상처는 지금도 돌아보기가 겁이 나 그때 사진들은 드라이브 깊숙이 숨겨뒀다. 아직까지 파편들이 마음을 쿡쿡 찌르는 것 같다.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보다 더한 고문은 없을 것 같다.

이전 22화 번외 3. 연애와 섹스가 결혼만을 위한 건가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