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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Apr 22. 2019

수고하셨습니다.

나를 울린 출국 심사관의 한마디

5년짜리 취업비자 아깝지 않으세요?


 대학 졸업 후 간사이 공항 지상직으로 근무하게 되어 재류 자격이 유학에서 취업으로 바뀌었다. 내내 염원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취업 비자 종류는 기술/인문지식/국제업무. 보통은 1년짜리가 나온다는데 나는 5년짜리 비자를 발급받았다. 2023년 3월 26일까지 일본에서 일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난 유효 기간을 한참이나 남겨두고 특권을 내 발로 걷어차고 나왔다. 남들은 못 받아서 안달인 5년짜리 비자였지만 9개월만 일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중장기 체류 자격을 가진 사람이 일본을 잠시 떠날 경우, 출국 심사관에게 재입국 허가서(출국 심사장 테이블에 배치되어 있다)와 재류 카드를 보여줘야 한다. 심사관이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물어보면 대충 언제쯤이라고 대답하고 나가면 된다. 일본에 입국할 때는 일일이 입국 허가서를 쓸 필요도, 외국인 줄에 서서 긴 입국 심사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4년 9개월간 이어온 일본 생활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간사이 공항 출국 심사대에 섰다. 이번에는 재입국 허가서도, 재류 카드도 내지 않고 여권만 보여줬다. 여권을 살펴보더니 심사관이 이렇게 물었다.


 -아예 출국하시는 건가요?


 -네.


 -비자 기간이 5년이나 남았는데 안 돌아오신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내 말을 들은 출국 심사관이 재류 카드를 달라고 하더니 구멍을 뚫어 무효 표시를 하고 돌려줬다. 그리고 나에게


 -お疲れ様でした。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인사했다.


 오사카 집을 정리하면서도, 마지막 근무를 끝내고도, 마지막으로 동기들과 술을 마시던 날에도 울지 않았는데 출국 심사관의 한 마디에 일본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니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이제는 쓸 수 없게 된 5년짜리 재류 카드






첫 재류카드를 발급받은 곳이 첫 직장이 되다


 간사이 국제공항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곳이다. 인생의 챕터가 바뀌는 순간들을 장식해준 곳이기 때문이다. 2014년 3월 24일. 단어만 나열하는 정도의 일본어 실력을 가지고 유학길에 올랐다. 신화 오빠들 데뷔일에 맞춰야 된다고 일부러 저 날 떠난 거다. 택시 예약을 잘못해 엄청난 바가지를 쓰고 교토로 이동하니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4월 1일 부모님과 함께 입학식을 올리고 정규 학부생으로 4년간의 공부를 끝낸 뒤 2018년 3월 22일 무사히 졸업했다. 힘들었던 졸업반 생활이 끝나고 다시 뵌 교수님이 얼굴이 많이 좋아져서 다행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졸업 후엔 스위스포트재팬 운항관리 부서에서 근무하게 되어 간사이 공항 출입증을 얻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가 작열하나 비행기를 날리기 위해 뛰어다니고 콕피트에 들어가 기장님과 이야기하는 게 일상인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가 열심히 계산한 로드 시트(Laod & Trim Sheet)를 보고 기장님이


 -Lovely

 -Perfect!


 라고 말해주실 때 가장 기뻤다.


 스무 살, 첫 독립, 신입 사원. 인생에서 가장 풋풋한 순간의 무대였던 간사이 국제공항. 언제 한 번 다시 가보나.


퇴근 할 때마다 데코레이션 바뀌는 거 구경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자기만의 방에서 나오다


 교토를 떠나며 너무 아프고 힘든 이사 준비를 한 탓에 ‘앞으로 내 인생에 이사는 없다’라고 다짐했지만, 일 년도 못 가 집을 빼게 되었다. 아예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는 거라 저번보다 할 일도 많고 복잡했지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어수선해 보이더라도 다 내가 좋아하는 걸로만 꾸몄다.


제일 좋아하는 건 양키 캔들 켜놓고 술 마시기. MIDSUMMER'S NIGHT향 최고.


 솔직하게 말해 내 맘대로 살기 위해 유학을 떠났다. 서울권 대학을 다니면 독립은 물 건너가고 통금 시간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가족들 눈치 보면서 살기도 싫었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 핑계를 대고 교토로 떠났다. 우리 집만의 룰을 버리고 (지켜야 할게 많답니다.) 내가 내 집의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었던 시간은 정말이지 행복했다. 구석구석 내 취향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향기도 온도도 모두 내 취향에 따라 채워갔다.






다시 누군가와 산다는 것


 퇴사하고 한국에 돌아간다는 기쁨에 취해 본가에 가면 가족들과 함께 지내야 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돌아가면 나 혼자 한 잔 하며 영화에 빠지는 것도, 대낮에 촛불만 켜고 반신욕을 하는 것도, 사람들 불러서 술 마시고 얘기하는 것도 못 하게 되는데 말이다.


 대신 학원 마감시간까지 지키고 있다가 퇴근하시는 부모님과 12시 넘어 야식을 먹어야 하고,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할머니가 하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척해야 하고, 주택 관리사 공부하는 아빠를 위해 음악에 파묻히는 것도 참아야 한다. 식사 시에는 식기류 각도 하나하나 신경 써서 세팅하고 할머니가 원하는 방식으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안 그러면 삐치신다. 조용히 자고 싶어도 할머니가 부엌에서 뭐 만드시고 정리하시는 생활 소음, 늦게 퇴근하시는 부모님이 새벽까지 TV 보는 소리에 ASMR이 필수가 되었다.


 많이도 싸웠다. 가끔씩 내가 한국 돌아와서 뭐 하고 있는 건지 현타가 올 때나 PMS 기간에는 짜증을 못 이기고 울면서 자기도 했다. 같이 살면서 스트레스받고 상처 받을 줄 바에 따로 사는 게 났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나쁜 년처럼 느껴지면서도 계속 집을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화도 났다. 냉전이 길어지니 집에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지만 패륜아로 보일까 봐 어디 가서 하소연 하지도 못 했다. 대화로 풀었다가 금세 삐걱거리고, 톱니바퀴 맞물리는 게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언제 이렇게 다 같이 살아보나? 어차피 금방 또 떠날 텐데, 맛있는 거 먹고 날 좋은 날 같이 나들이 다니면서 보내야지. 나갈 땐 나가더라도 지금 이 순간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 중이다. 긴 싸움 끝에 이제 아침 한 끼 정도는 내 맘대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서로 집을 비울 때를 이용해 스트레스를 푼다. 얼마 전 전남 여행하시느라고 할머니가 2박 3일 집을 비우셨는데, 배달 음식 시켜서 나무젓가락으로 아무렇게나 먹었다. 얼마나 행복하던지. 나도 여행을 떠나고 집을 비울 궁리를 찾으며 돌파구를 만들고 있다.


 가족 간에도 서로의 공간을 인정해주는 연습이 필요했다. 지금도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원만하게 부대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매일 노력 중이다.


 20대는 우리가 진정한 독립을 꿈꾸고 실천하는 결정적인 시기기에, 가족 때문에 힘들고 아픈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내가 이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라고 인정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 모든 문제를 다 떠안고 책임지겠다고 안간힘 쓰다 보면, 나도 부서지고 가족 또한 무너진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때로는 '착한 척'하면서 견딜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고, 때로는 '강한 척'하면서 다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그렇게 자신을 질책하다 보면 가족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조차 흔들리게 된다. 단번에 나아지지 않더라도, 함께 조금씩 노력한다는 것을 서로가 믿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가족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첫 걸음이 아닐까.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정여울, 21세기북스, 2013, 294pp.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매일 가족들 삼시 세끼 만드시느라 고생하시는 할머니도,

 6주 만에 겨우 하루 쉬면서도 새벽 공부하고 출근하는 아빠도,

 학원 일 하면서 사회복지사 수업을 듣고 마지막 시험을 끝낸 엄마도,

 4년 9개월 간 일본에서 혼자 지내며 읽고 보고 느낀 것들을 글로 풀어낸 나도


 모두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 )



우리 집 봄 연례행사 사나사(舍那寺) 나들이 갔던 날. 다들 행복했으면. 17.APR.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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