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짜리 방구석 세계 일주
Q. 이 시대에 영화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나.
A. “영화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이야기를 통해 강렬하고 잊을 수 없는 소통의 경험은 물론, 역사 너머 숨겨져 있는 진실을 드러내 주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해준다. “
씨네21 스페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 인터뷰> 중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6298
그리스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은 영화의 역할을 위와 같이 정의한다. 저 대답 하나가 내가 영화를 보는 모든 이유를 망라한다. 일단 영화관에 가면 만 원 남짓한 돈으로 세계 여행을 할 수 있다. 이마저 여의치 않다면 구글 플레이 스토어 같은 데서 더 싼 가격으로 방구석에 앉아 다른 나라 혹은 다른 시대를 여행할 수 있다. 이보다 더 가성비 좋은 간접 경험이 어디 있을까. 코스타 가브리스 감독의 말대로 영화는 간편하게 다른 사람들의 삶으로 나를 인도하는 가이드 같은 역할을 한다. 꼭 무언가를 배우려고 영화를 보지 않아도 좋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마음이 답답할 때 두 시간 정도 다른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기분 전환도 되고 일의 효율도 오르고 일석이조다.
영화를 본 후의 여운을 즐기다 보니 일 년에 100편 이상 보는 게 일상이 됐다. 자연스레 이력서 취미란 에는 ‘영화 감상’이라 적는다.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학교-학원-집의 무한 루틴을 반복하느라 영화관에 가는 것은 사치요, 집에서 영화 볼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보고 싶은 개봉작이 있어도 ‘나중에 보지 뭐’ 이러다가 기억에서 잊히기 일쑤였다. (보고 싶었던 작품들도 왠지 죄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었다.)
대학 입시가 끝나고 시간이 남아돌던 시절, 생각해보니 이제는 24시간이 오롯이 내 것이었다. 게다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맘대로 봐도 되는 나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야한 영화만 주야장천 봤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작품을 떳떳하게 골라보는 선택의 재미에 매료되어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이 장르 저 장르 찾아보고, 어떤 배우에 빠져 필모그래피를 빠짐없이 털고, 딱히 보고 싶은 게 없을 땐 <달세계 여행>부터 차례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화를 찾아보았다.
자율적으로 내가 보고 싶은 것을 골라 본다는 즐거움과 두 시간가량 눈 앞에 펼쳐지는 이세계(異世界)는 나를 영화의 세계로 빠져 들게 하기 충분했다. 특히 교토로 유학을 떠나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침에 눈 뜨면 영화, 밥 먹으면서 영화, 수업 듣고 와서 영화, 자기 전에 술 한 잔 하면서 영화... 영화와 동거하다시피 했다. 생일에는 <어바웃 타임>을, 울다 지쳐 잠들고 싶을 때는 <타이타닉>을, 아무 생각 없이 다른 곳에 앉아 있고 싶은 기분일 때는 흑백 프랑스 영화를 보았다. 취준생 시절 면접을 본 뒤 지쳤을 때도 정장 차림 그대로 간식 하나 사들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가 나의 기분을 달래 주기도 했고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동기부여가 되어 주었다.
누벨바그의 대표작 <쥴 앤 짐> (1961)의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평을 쓰는 것이고, 세 번째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평론 까지는 아니지만 각 작품의 여운을 잊지 않기 위해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손으로 작품의 역사적 배경, 모티프가 된 것들, 영화를 본 날의 감정을 정리하다 보니 영화를 보는 게 아닌 읽을 줄 아는 눈이 생겼고, 주인공들로부터 삶을 영위하는 가치관을 배울 수 있었다. 가끔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보다 영화를 보며 주인공과 마음속으로 대화하는 편이 더 유익했다.
대학 졸업반 시절, 4학년 1학기가 다 지나가도록 나 혼자 내정받은 회사가 없어 우울의 극치를 달릴 때, 무언가 해야겠다는 자극을 준 것도 영화였다. 광고 세미나 소속이었지만 교수님이 졸업 논문은 꼭 광고 관련이 아니어도 좋다고 말씀하시는 순간 나는 영화에 관해 쓰겠다고 다짐했고, 집 밖으로 나왔다. 원하는 논문을 찾기 위해선 다른 대학 도서관까지 달려갔으며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전시회도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 이것저것 얘기하면서 우울함을 극복해나갔다. 그 결과 사십 페이지에 달하는 졸업 논문을 완성해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동기 부여를 해주고 깨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준 영화가 나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