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로 말하고 공부하기 힘들지 않았나요?

유학은 완벽한 상태로 가는 게 아니다

by 가람

학점만 잘 나오면 뭐하나, 말을 못 하는데


처음부터 일본 회사에서 일할 수 있을 만큼 회화 실력이 빼어나진 않았다. 자기 전에 내일 무슨 말을 할까 사전 찾아보면서 나만의 대본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수업 시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게 일본 유학 대비 학원을 다니게 되면 일단은 합격이 목표기 때문에 회화는 뒷전이 된다. 제일 중요시되는 것이 1. 작문/소논문 2. EJU 3. 면접이다. 입학 지망서 (내가 왜 이 대학, 이 학과에 가고 싶은지 A4 1~2 페이지 분량으로 적는 것)와 이를 바탕으로 한 면접 대비가 수업의 대부분을 이룬다. 일본 대학 입시 준비생 정도면 한자나 단어는 자투리 시간에 알아서 공부하고 선생님이 봐주는 식이었다. 이런 시스템 덕분에 리포트 쓰는 기술이나 일상생활에서 안 쓰는 어려운 어휘는 몸에 배었다. 그래서 대학에서 수업 듣고 과제 제출하고 간단한 발표 하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토플 보면 스피킹 점수만 낮은 애

그게 바로 나야 나


내성적인 성격 탓일까? 영어를 배울 때도 리딩, 리스닝, 라이팅까지는 어떻게 해보겠는데 도저히 스피킹 실력은 마음처럼 늘지를 않았다. 토플 스피킹 파트에서 30점 만점에 절반 넘기는 게 어찌나 힘들던지. 영어보다 늦게 배우기 시작한 일본어는 말할 것도 없겠다. 독해와 단어 중심의 공부 방법 탓에 나의 회화 실력은 그대로였다.


개강하고 나니 역시나 문제는 회화였다. 동기들과 대화가 안 통했다. 일상 대화도 힘들어 죽겠는데, 대학생들이 자주 쓰는 표현(空きコマ-공강 生協-교내 편의점 ルーズリーフ-한 장씩 쓸 수 있는 노트 ゼミ-세미나)은 물론 못 알아들었고, 간사이 지방에 있는 학교이다 보니 사투리(やんな、おる、うち、つれ 등)가 어마 어마 했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내가 아는 일본어 문장 구조라고는


-안녕하십니까. 무슨 무슨 고등학교에서 온 안가람이라고 합니다.

-저는 두 가지 이유로 일본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첫째…


이런 것 밖에 없는데. 이렇게 말하고 다니면 우리 과에 이상한 유학생 있다고 소문날게 뻔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낯가리는 완벽주의 성격이 상태를 더 악화시켰다. 용기 내서 뭐라고 말했다가 그게 아니라고 지적당하면 얼굴 빨개져서 집에 가서 이불킥 하기 일쑤였고, 내 발음에 한국어 나마리(억양)가 남아 있을까 봐 말 한마디 한마디 신경 써서 하다 보니 금방 피곤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막 들이대지 못했던 게 가장 후회된다. 유학은 완벽한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니다. 완벽해지려고 가는 거지. 학년이 올라가고 나서 한국인 신입생들이 억양 신경 안 쓰고 손짓 발짓으로 일본인이랑 얘기하려는 모습 보고 많이 반성했다. 그렇게 행동하니 일본인들도 먼저 말 걸어주고 알려주려고 하니 금방 친해지더라.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와 <최악의 하루>

서투른 노력도 필요하다


두 작품 모두 한국인 여성과 일본인 남성의 서툰 커뮤니케이션이 극을 이끌어 간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는 시골 마을 고조(五條)에 홀로 여행 온 ‘혜정’과 마을 안내소에서 우연히 만난 ‘유스케’가 주인공이며, <최악의 하루>에서는 연극배우 ‘은희’와 신작 소개를 위해 한국을 찾은 작가 ‘료헤이’가 나온다. 두 주인공 사이의 공통 언어라고는 서툰 일본어와 영어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고 느릿느릿 걸으며 서로의 말소리에 귀 기울인다. 배경이 일본이냐 한국이냐, 누가 길 안내를 하느냐의 차이지, 결국엔 완벽하지 않은 언어로도 감정의 교류가 일어날 수 있음을 얘기한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키스로, <최악의 하루>에서는 은희의 무용과 료헤이의 시(詩)로 짧은 시간에 가까워진 둘 사이를 그린다.


이미지 출처 :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장건재, 2014)


이미지 출처 : 영화 <최악의 하루> (김종관, 2016)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 도쿄(東京)에 있는 고등학교로 1달간 교환유학을 떠났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야 말로 내 일본어는 더 형편없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한국어, 영어, 일본어, 보디랭귀지를 섞어가며 친구들과 소통하려 했었고 조급해하지 않으며 서로의 뜻을 이해하려 했었다.



<최악의 하루>의 감독 김종관과 '은희' 역을 맡은 배우 한예리는 <씨네21>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김종관- 그런 면에서 료헤이와의 소통 장면이 중요했다. 은희와 외국인인 료헤이는 초급 영어로만 간간이 말을 잇는 사이다. 말로 관계를 맺어온 현오나 운철과는 다르다. 그런데 이 단순한 말들을 통해서 오히려 둘이 더 소통을 하게 된다.


한예리- 실제로 촬영 때도 그런 경험을 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을 할 때는 그냥 있어도 잘 들리니까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걸 주의 깊게 들을 일이 없는데, 이와세 료와는 영어와 일어로 이야기하니까 하나라도 더 듣고자 상대의 제스처에 더 집중하게 된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되는구나 싶더라. 자연스럽게 마음이 더 오픈되는 경험이었다.



맞는 말이다. 둘 사이에 공통 언어가 있다면 뒤통수에 대고 얘기를 해도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얼굴을 맞대고 눈을 마주 보며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런 노력이. 완벽하지 않지만 노력하는 게 언어를 배우고 대화하는 정답인 것 같다.






대학 신입생 시절의 나는 노력에 앞서 두려움이 컸었다. 교환 학생 때와는 달리 정규 학부생으로 4년간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더 완벽해지려고 했고, 내가 한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에 (우리 과에 한국인이 나 하나였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처음부터 완벽한가. 배우면서 완벽해지는 거지. 한자 획순 틀렸다고 지적해주면 고마워하면 되고, 내가 먼저 다가가서 얘기하면 됐었던 거다. 혹시 아나. 그러다가 눈 맞아서 연애도 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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