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어떤 장르 즐겨 보세요?

내가 고전을 즐기는 이유

by 가람

오전 열 시의 영화제

午前十時の映画祭: 일반 사단 법인 영화연극문화협회 (映画演劇文化協会) 주최. 매일 영화관에서 외화 영화 50편을 상영하는 기획이며 상영작은 일주일마다 바뀐다. 원래는 오래된 필름을 복원해 상영하였지만, 2013년 4월부터는 <신・오전 열 시의 영화제 디지털로 되살아나는 영원한 명작> (新・午前十時の映画祭 デジタルで甦る永遠の名作)이란 이름으로 선정된 작품들을 디지털 리마스터링해 상영해준다.


교토 집 근처 영화관에서는 매일 오전 열 시, 프리미엄 관에서 고전 영화를 상영해줬다. 가격도 단 돈 500엔 (5000원 정도). 동전 하나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도 기쁜데 DVD 구하기도 어려운 작품들을 편안한 좌석에 앉아 볼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졸리니까 스낵바에서 파는 250엔짜리 커피 한 잔 사서 들어가면 그게 바로 소소한 사치였다. 가끔씩 내 또래도 눈에 띄긴 했지만 주 관람객은 노년층이었다. <빽 투 더 퓨쳐> 시리즈 상영 때를 빼고는 만석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람들은 다른 이의 자리를 피해 듬성듬성 앉았고, 조용히 영화 상영만을 기다렸다. 그곳에 앉아서 불이 꺼지기를 기다리는 심정은 마치 <시네마 천국>에서 꼬마 토토가 알프레도 할아버지의 영화관을 찾는 것 마냥 설레었다.


500엔짜리 영화와 250엔짜리 커피. 이 날은 <앵무새 죽이기>를 봤다. 10.FEB.17


스릴러를 다루는 히치콕의 기술이 당시에는 획기적이었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라 지금은 <서치> (아나쉬 체겐티, 2018) 같은 작품이 더 신선하게 다가온다. 또한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과 ≪오만과 편견≫이 18세기에는 최고의 연애 소설이었겠지만 지금 보면 남자와의 결혼만을 연애의 성공으로 여기는 가치관은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은 회자된다. 히치콕이 발명한 여러 촬영 기법은 현재 영상 제작의 문법으로 자리 잡았으며, 고전 소설 속 묘사된 모습은 당시의 시대상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내가 고전을 즐기게 된 것은 순수히 재미 때문만은 아니다. 이처럼 고전은 세상을 살아가는 밑거름 같은 존재기 때문이다.






광고 공부를 위한 고전

고전, 시대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한다


이 순간 존재하는 모든 것 사이에는 인과율이 존재한다. 사회의 수요와 인간의 심리 역시 마찬가지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백 년, 길게는 몇 천년 전부터 변화하고 발전해 온 것들이 지금의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인과율의 이해> =

<과거를 배우는 것> + <과거와 현재의 공통분모 찾기> + <깨달음을 현재에 맞게 재창조 하기>


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위 수식을 실천하기 위한 가장 편리하고 경제적인 교과서가 고전이라고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는 서양 고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남녀 관계, 결혼과 가정을 둘러싼 이야기가 공감을 일으킨다. 세세하게 묘사되어 눈 앞에 펼쳐지는 19세기 러시아 농부들의 상황과 사교계의 모습은 덤이다. 또한, 헤르만 헤세의 소설 속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 조력자를 만나고 자아를 찾는다는 플롯은 <해리포터> 시리즈나 <문라이트> (베리 젠킨스, 2016)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전 작품이 시간과 국경을 뛰어넘어 사랑받는 것은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보편성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보편성, 즉 공통분모를 현재에 맞게 재구성하는 힘이 바로 이 시대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힘이다.






광고, 시대의 흐름을 읽어 낸다


'창의력'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박웅현 씨를 인터뷰한 책 <인문학으로 광고하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광고는 시대 읽기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껌 광고에서부터 기업 광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의 광고에 필수적이다.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광고는 공감대가 없고, 공감대가 없는 광고는 존재 이유가 없다. 시대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준다는 측면에서 전혀 히까닥 하지 않은 광고를 하는 나에게 영양제가 되어 준다. (중략) 광고는 또한 사람 읽기다. 갓난아이부터 파파 할머니까지 모든 사람들의 바람과 현실, 희망과 절망을 가능한 한 많이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들과 진솔한 대화를 할 수가 있고 진솔한 대화가 있어야 그들의 마음은 열린다. 광고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깃 분석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땀을 투자하는 것이다. 사람이야 말로 아는 만큼 보이고 그때 보이는 것이 전과 같지 않은 존재다.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박웅현/강창래 지음 알마, 2009, 52pg


4년간 광고 세미나에서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세계사, 미디어의 발전 과정, 예술학 등 공부해야 할 잔뿌리가 많다는 것이다. 잔뿌리가 시대와 사람을 읽는 바탕이 되어주고, 잔뿌리의 중심에는 고전이 있다. 물론 중독성 있는 캐치 카피나 디자인도 광고의 성공 여부에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그런 걸 고민하기에 앞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광고하려는 대상’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는 것이다. 사람을 대상으로 콘텐츠를 발신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수요와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거-현재-미래를 사유하다

'카시하라 신궁 앞 역'은 왜 허물어지지 않았을까?


대학 3학년 첫 조별 과제는 건축 전시회에서 시작됐다. 1930년대에서 60년대 사이에 활동한 건축가 무라노 토고 (村野藤吾)의 건축물을 하나 골라 현존 여부와 그 나름의 이유를 조사하고 생각하여 발표해야 했다. 과제를 하면서 광고 세미나에 웬 건축 전시회 인가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도 시대의 흐름과 수요의 변화를 추론하는 연습이었다.


아르누보 건축 양식 -이미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아르누보 (Art Nouveau) -1890년에서 1910년 사이에 유행한 예술 양식. 둥글고 섬세한 장식이 특징이다. 에 대한 반발로 1920-30년대 일본에서는 실용적이면서도 자국의 문화를 수용하려는 건축 붐이 있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가 나라(奈良) 현 카시하라(橿原) 시에 있는 카시하라 신궁 앞 역(橿原神宮前駅)이다. 급격한 인구 증가와 도시화로 인해 교통수단이 필요해져 1939년 지어진 이 역의 외관은 모더니즘 양식에 따라 쭉쭉 뻗은 직선으로 이루어져 간결함과 실용성을 뽐낸다. 한편, 내부 중앙 광장은 진무 천황(神武天皇)에 대한 이야기가 새겨진 벽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모더니즘과 일본 문화가 융합된 건축물로 인정받아 지금도 이용되고 있다. 다른 조의 발표를 들어보니 허물어져 없어진 건축물도 꽤 있었다. 유명한 건축가의 건물이라고 해서 모두 살아남는 게 아니었다. 건축될 당시의 시대 수요, 예술 트렌드에 대한 이해, 현재에도 이용 가능한 실용성 등이 종합적으로 평가받아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다. 건물 하나를 들여 봤을 뿐인데 건축 당시의 사회상, 이전의 예술 흐름, 그리고 지금까지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가 있다. 고전도 마찬가지로 시간을 뛰어넘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 하나를 봐도 열을 알 수 있는 통찰력을 갖게 해 준다.


건축 당시 카사하라 신궁 앞 역의 모형 (좌) 현재의 카시하라 신궁 앞 역 (우)






고전 × something new =?


고전을 지금의 감각에 맞게 재창조하는 건 어떤 일일까?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 지금 현재 소비되고 있는 많은 문화 콘텐츠를 살펴보면 된다. 물론,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는 콘텐츠도 적지 않지만, 이에 못지않게 고전으로부터 모티프를 얻은 것들도 많다. 예를 들자면 영국 드라마 <SHERLOCK> 시리즈 (BBC)가 있겠다. 추리 소설의 대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를 1. 소설에서 영상으로, 2. 설정 역시 현재에 맞게 변경하여 방영 당시 많은 덕후들을 낳았다. 기본 설정은 그대로 유지한 채, 2010년대로 셜록 홈스의 내용을 각색하고, 이에 모자라 드라마 덕후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을 심어 고전을 재탄생시켰다. 고지능 소시오패스와 퇴역 군의관이 만들어 내는 브로맨스, 셜록의 머리 돌아가는 속도와 맞먹는 세련된 편집술, 런던 어딘가에 비밀 조직이 움직이고 있을 것 같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까지. 원작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여러 변화를 주어 신선함을 더한다.


현재 재창조된 고전 작품들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점이 계속 유지되고 있으며, 어떤 점이 바뀌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계속 유지되는 점들만 잘 파악해도 예부터 사람들이 좋아했던 보편적인 감성을 익힐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진부하지 않게 표현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천차만별임을 알 수 있다. 소설을 영상 매체로 옮기는 일은 요즘 시대에 아주 널리 쓰이는 방법이다. 연금술사처럼 이것저것 조합하며 신선하고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새로운 길을 뚫어야 한다. 2005년 이미 영화화된 ≪오만과 편견≫을 또다시 영화로 만든다면 신선미는 떨어진다. '좀비'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집어넣는다면 모를까. 이미 시도된 방법들은 예전의 것이다. 좋은 예 나쁜 예를 보고 배우며 앞으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조사하고 ‘요즘엔 이런 게 유행인데 이걸 어떻게 접목시켜볼까?’ 고민하는 것이 고전을 통해 미래를 사유하는 방법이 아닐까.






당장 고전이 밥 먹여준다고는 못 말하겠다. 실제 면접에서 이런 얘기한다면 인성 면접은 붙더라도 실무 면접에서는 떨어진다. 면접관들은 인턴 경험이나 공모전 스펙을 더 좋아했다. 하지만 고전은 길을 잃었을 때 나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 아이디어의 영감이 되어주기도 했고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며 '그래. 지금이나 옛날이나 고민하는 건 똑같구나.' 위안을 주기도 했다. 지금도 아무것도 하기 싫어질 때면 책장에서 고전을 하나 골라 집어 조용한 장소로 가서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며 생각을 정리한다. 책을 읽었을 뿐인데 정신이 맑아지고 무언가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4_2.JPG 나의 고전 컬렉션의 정수. 02.JAN.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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