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따듯한 손길이 그리웠던 그때 그 시절
9살,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을 정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10걸음 정도만 걸어가면 되는 거리에는 까치발을 간신히 추켜올려야만 보이는 커다란 벽이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소파와 쿠션이 있었다.
그 커다란 벽 넘어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들은 여전히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커다란 벽에서 5걸음 정도 떨어져 까치발을 들고, 비좁은 창문으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바라본 엄마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이 엄마를 이리저리 말리며, 하얀 침대에 강제로 눕히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문 빈틈 사이로 들리는 엄마의 큰 소리는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와 소리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을 먹은 채로 그 맞은편에 있던 소파로 달려가 쿠션을 끌어 앉은 채 숨죽여 있었다. 무서웠던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눈물만 흘렸다. 눈물을 흘리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그 당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자책하며 미워하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 밤이 되었을 무렵에도 눈물이 끝내 멈추지 않았지만 엄마가 잠들 때쯤 아빠께서 소파로 와서 무릎베개를 해주셨다. 아빠께서는 내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흐르는 눈물을 머금고 눈물을 들키기 싫어 밤새 조용히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강한척하며 살기로 다짐했다. 가뜩이나 엄마로 인해 신경 쓰며 속상했을 아빠에게 나까지 무거운 짊이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이 되었을 때, 진정제, 수면제 등 약물 투여로 인해 엄마는 조금씩 호전되셨지만 나에게는 엄마의 따듯한 손길이 필요했던 시기와 더불어 주변 사람들을 속상하게 하는 것만 같았던 엄마가 밉기도 했었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무렵, 자동차 안에서 우연히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아빠와 하게 되었다.
대화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엄마의 병명을 알게 되었는데, 병명은 정신 분열증이었고, 지금은 이름이 바뀌어 조현병으로 불린다. 어떤 병인지 잘 몰라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기도 했지만 쉽게 이해가 되진 않았고, 지금 생각해보면 9살이라는 나이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렇게 퇴원 후, 다시 바쁜 일상 속으로 돌아왔다. 나는 학교를 가야 했고, 학교가 끝나면 컴퓨터 학원에 가야 했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항상 집에 혼자 있는 엄마가 괜스레 걱정되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5일이 지나고 나면 즐거운 주말이 돌아온다. 물론 다른 친구들은 놀고 있을 때, 컴퓨터 학원에 가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해야 했지만 그래도 학교를 가지 않았기에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주 주말마다 엄마를 찾아오시는 동네 사람들은 매번 달라지셨지만 밭에서 기른 상추, 깻잎, 고추를 가지고 나눠주러 오셨다. 정말 정이 넘치고, 좋은 분들이셨지만 내게는 방문을 쿵하고 닫고 바쁘다는 핑계로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 모두 엄마를 만나고 나서 내게 하는 이야기는 항상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프니까 네가 더 잘해야 해”
“엄마는 아프니까...”
주변 사람들은 항상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고,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책하며, 나를 다그쳤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세상은 그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는 것이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의 생각이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또한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사랑할 수 없고, 언제 어디에서든 나는 내편이 먼저 되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강한 척, 괜찮은 척 견뎌온 자신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기에.
나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는다.
마음속 깊은 상처는 시간만 지난다고 해서 절대 쉽게 치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깊은 상처를 알아차리고,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며 오랜 시간 엉킨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풀어주어야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