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커리어는 이제 그만 접겠어요
나 마케팅하기 싫어.
매번 트렌드 아야 하는 것도 싫고, 보여주기 삶에 불과한 SNS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싫어. 다 신물 나. 아무래도 나이 들면 이 쪽 분야에 감각이 떨어질 테니 오래 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것 같고.
돌이켜 보니 커리어 그거 뭐 별거 없더라.
이제 대단한 성공도, 크게 돈 벌고 싶은 욕심도 없어.
그냥 여기 독일 시골에서 단순 노동자가 되어 소소한 행복 누리면서 살래.
우리 집 주방 식탁에 앉아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창밖으로 토실하게 살진 소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다. 골목 어귀에는 지은 지 100년 정도 되었다는 그림같이 예쁜 나무 목조 건물이 보이고, 저녁 8시가 되면 마을 전체가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해진다. 텔레토비 동산 같은 사시사철 싱그러운 연초록의 자그마한 언덕에서 소들은 열심히 풀을 먹다가 오후 1시 즈음이 되면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풀 위에서 낮잠을 잔다. 아마 이 소들보다 내가 더 게으르리라. 소들이 이리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지, 매번 같은 시간에 낮잠을 자는지를 이곳, 독일에 와서 처음 알았다. 하긴. 서울촌년 알 길이 없지 않은가.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더 큰 세상을 경험하고 싶다며 중국 상하이로 갔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빠르게 부상하는 나라였다. 외국 기업에 관대했던 때였다. 그래서 상하이는 세계에서 온 각종 기업들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곳에서 만났던 어느 스페인 남자가 푸동의 화려한 마천루를 보며 말했다.
이곳은 꼭 아시아의 뉴욕 같다고.
정말 그랬다. 인터내셔널 하고 희망이 가득한 도시 상하이 - 그곳에서 나의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스웨덴 회사, 캐나다 회사에서 마케팅을 했다. 길어야 2년 정도 있다가 오겠지 생각했던 부모님은 딸이 한국으로 귀국할 생각을 하지 않자 불안해하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그곳에서 화려했던 이십 대를 보냈고, 서른을 맞이했다. 외국 기업에서 젊은 나이에 마케팅 매니저로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외국인 셰프가 한다는 맛집을 찾아다니며, 전 세계에서 온 친구들과 파티를 하는 그 삶은 분명 즐거울 줄 알았는데,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일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도 아닌데, 그냥 힘들었다. 열심히 할수록 더 지쳤고 공허했다.
결국 번아웃이 왔다. 그리고 완벽한 타이밍에 지금 남편이 있는 독일로 훅 날아와 버렸다. 정말 훅- 하고. 운명적인 타이밍이었다고 하지만 어쩌면 도피였을 수도 있겠다. 살기 위한 도피. 마지막 희망.
모든 것이 너무 순식간에 진행된 탓에 지인찬스를 써서 겨우 얻을 수 있던 집이 바로 소들이 뛰어노는 것을 구경할 수 있는 이 시골집이었다. 프랑크푸르트까지 차로 30분이면 가는 거리라고 하지만, 운전을 못하는 나에게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한 시간에 한 번 오는 마을버스를 타고, 중간에 트램으로 갈아탄 후, 기차를 타야 프랑크푸르트 - 도시 구경을 겨우 할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물었다.
"너 괜찮은 거야? 대도시에서만 살다가 이런 시골에서 사는 거 정말 괜찮아?"
나는 진심으로 좋았다. 독일의 시골 생활이.
돈, 성공, 일에 대한 욕심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남편에게 말했다.
나 이제 마케팅 일 안 할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에서 천명이 넘은 유럽 인플루언서들과 일을 하고, 마케팅으로 매출을 1000% 이상 올리게 될 줄은 그때는 전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