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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썬맨 Oct 24. 2021

극동의 러시아 사람 긴장하게 만드네

첫 여행지 러시아에 가자마자 택시 납치당할 뻔 한(?) 이야기

“괜찮아 여보, 아무 일 없을 거야.”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우리는 조금 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밤늦은 공항 분위기는 삭막했다. 여행친구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카우치서핑이라는 사이트를 통해 카우치 호스트 일마네 집에 며칠간 머물기로 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타고 도시로 들어가는 중. 하지만 기사 아저씨와는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다. 휴대폰으로 캡쳐해온 주소를 보여주자 고개를 끄덕이며 타라는 신호.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깜깜한 거리를 달리고 있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이 원래 그렇겠지만 사방엔 휑한 길만보일 뿐 인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분위기다. 게다가 험악한 인상의 기사 아저씨는 러시아말로 어디론가 계속 전화를 한다. 


‘혹시 이 사람 납치범 아이가?’

‘이 길이 맞는 걸까? 도시로 가고 있는 것 맞겠지?’

‘기사 아저씨 덩치는 왜 저렇게 큰 거지?’


여행 초보답게 온갖 의심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구글 맵스를 켜서 우리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보려고 했지만 한국을 떠나오는 순간 휴대폰은 이미 서비스 중단상태였다. 


“아저씨, 이 주소로 가고 있는 것 맞아요?”


주소지를 재차 보여주며 바른길로 가고 있는지 확인을 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에게 맞게 가는 것 같다며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도착할 때까지 안심할 수가 없다. 얕잡혀 보이면 안 좋을 것 같아서 태연하게 앉아있었지만 머릿속엔 만약에 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공격하고 아내를 데리고 택시 밖으로 뛰쳐나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지 시뮬레이션을 그리느라 바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엔 아니 불과 어제까지는 긴장과 설렘의 중간 어디쯤에서 핑크빛 상상이 가득했다. 남일처럼 부러워만 하던,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긴 여행을 아내와 시작하게 되다니 마치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공이라도 된듯했다. 여행을 하면서 이전의 삶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을 겪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배움을 얻고,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나를 바라보고 이해하게 되는 꿈같은 시간이 가득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나의 시나리오를 뒤집고 현실의 여행은 위기가 먼저 찾아오는 듯했다. 극한의 긴장 속에서 택시는 어두운 길을 달렸다. 어디론가 계속 통화를 하는 아저씨의 의심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보슬보슬 비가 창문을 적셔댔다.


수십 분쯤 달렸을까 어두컴컴한 한 건물 앞에 차가 섰다. 재빠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떤 아파트 단지 안인 것 같은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커다란 철문이 보였고 기사 아저씨가 뭐라 뭐라 하면서 도착했다는 사인을 보내는 것 같았다. 설마 여기가 일마네 집이라고? 불빛 하나 없는 단지 하며, 심하게 벗겨진 건물 외벽 페인트와 커다란 철문은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꼭 드라마에서 악당들이 주인공을 잡아 가두는 곳 같은 느낌이 났다. 아저씨는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우리가 여기 도착했으니깐 빨리 나와서 데려가라고 동료들에게 연락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걸까? 아니 아니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분위기다. 


잠시 후 굳게 닫혀있던 철문이 덜컹하고 열렸다. 누군가 나오려는 것 같았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터질 듯이 가슴이 쿵쾅거렸다. 어두운 철문에서 누군가 나왔다. 엥? 일마였다. 


“안녕 썬맨 앤 조이! 어떻게 기사 아저씨한테 내 연락처를 알려준 거야? 전화가 계속 와서 너희들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상세하게 들을 수가 있었어. 여기까지 온다고 수고 많았지?”


순간 긴장이 확 풀렸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사건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택시에 탈 때 아저씨에게 이곳으로 가자며 캡쳐한 화면을 보여주었다. 


'뭐? 납치범이 아니었다고??(마치 납치가 맞아야 속이 시원하는 듯이)


우리가 보여준 화면에는 주소와 함께 일마의 전화번호도 적혀있었다. 주소와 전화번호가 있는 화면을 보여줬기에 아저씨는 친절하게 일마에게 전화를 걸어두었던 것이다. 데리고 그쪽으로 잘 가고 있다고. 납치범 동료들과 통화하는 줄 알았던 통화는 일마와의 통화였던 것이었다. 세상에, 완벽하게 한방 먹었다. 아내를 지키고 이 여행을 이어가기 위해 늘 안전을 생각하고 긴장해야 하는 건 맞지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을 납치범으로 몰아가다니. 아이고 아저씨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를 꿈꾸며 머릿속에 그렸던 여행을 나 스스로 공포 가득한 스릴러물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았다. 쓸데없이 너무 긴장했다. 오히려 아내는 덤덤했는데 말이다. 


“땡큐! 땡큐! 스파시바! 스파시바!” 


미안함을 가득 담은 마음으로 아저씨에게 인사했다. 미안해서 살짝 팁도 드렸다. 험상궂은 인상

은 온데간데없고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같은 웃음을 보이며 응답하는 아저씨. 


“어서 들어와. 여기가 너희들이 머물 방이야. 내 방은 저쪽이고. 뜨거운 물 나오게 해 놨으니깐 샤

워하고 일찍 쉬어. 밤이 늦었으니깐 자세한 인사는 내일 아침에 하자”


단단한 철문 속 일마네 집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적시며 긴장과 피로를 녹였다. 어이없는 웃음이 피식 났다. 처음 겪어보는 낯선 상황 속에서 내면에 있는 진짜 모습이 하나씩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아내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과 무섭고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 만약에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선 고민들. 분명 이전에는 이렇게까지 해본 적이 없었던 마음들이었다.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상황에 놓일 거고 그때마다 이전에 몰랐던 우리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아내 또한 내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여행이 서로가 몰랐던 모습까지 발견하고 이해하고 사랑해가는 성장의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아저씨 정말 미안해요. 오해해서. 


납치당하는 줄 알았던 블라디보스톡 택시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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