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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썬맨 Oct 24. 2021

블라디보스톡 유원지에서 만난 어린 시절

테마파크 마케터 눈에 비치는 러시아 가족의 모습

한 애니메이션 영화 속 장면이 떠오른다. 주인공인 닭을 잡아먹기 위해 쫓아다니는 악당 늑대의 모습으로 영화 내내 비치지만 영화 말미엔 어린 새끼들을 먹이기 위해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부모의 모습으로 비쳐 먹먹한 마음을 자아내던 장면이 말이다.


세상의 많은 나라들이 아무리 다른 환경과 이념 속에 살아가더라도, 종교, 이념, 인종을 떠나 공통적인 느낌을 주는 한 곳이 있다면 그곳은 테마파크일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망가지고, 우스꽝스러운 표정도 지어줄 수 있는 곳. 아이들은 신이 나서 뛰어놀고 아빠와 엄마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곳. 성인이 된 자녀들이 부모님과의 추억을 생각할 때 단골로 떠오르는 장소. 아내와 함께 블라디보스톡 해안가에 있는 유원지를 방문했다. 


작은 해변가에는 오리배가 띄워져 있고, 놀이공원 안에는 범퍼카, 뽑기, 회전그네, 대관람차 등 여러 놀이시설이 있다. 평일이라서 그렇게 많은 관람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 가족단위로 온 사람들이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있다. 


아빠와 함께 사격을 하는 아이. 회전그네가 무서워 울먹거리며 두 손에 힘을 주고 그네를 탄 아이.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사이좋게 먹고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우리가 여행 중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일상을 벗어나 여가를 보내고 있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소소한 행복이 느껴진다. 


조용히 그 사이를 걸으며 아내와 함께 즐거운 상상에 빠져본다. 


현재의 우리 가족은 아내와 나 이렇게 둘. 우리가 가족이 되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을 텐데 한 유원지에서의 데이트로 그 찬란한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 부산 초읍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 부산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쯤 방문해본 추억을 갖고 있는 유원지이다.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뭐가 그리 좋았던지 롯데리아 햄버거를 사들고 길고 긴 대공원 내부를 걸으며 아무리 나누어도 질리지 않는 서로에 관한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알아도 알아도 더 알고 싶은 양파 속처럼 이 꿈같은 시간이 조금만 더 천천히 흘러갔으면, 각자 헤어져 집에 가야 하는 시간이 조금만 더 천천히 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었다.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은 꽃길로 변했으며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는 [비포 선라이즈]의 명대사도 울고 갈 사랑의 명대사들로 가득 찼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순간에도 계속 문자메시지를 주고받고, 함께 찍었던 사진을 곱씹어대었던 달콤했던 첫 데이트의 순간들.


“그때 우리 정말 상큼하고 좋았다 그치?”

“나는 지금도 상큼한데?”

“그래 우리는 지금도 상큼하다 그자.”

“당연하지. 사랑은 생각하는 만큼 늙는다고 하더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분명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기 위해 내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애썼었다. 아내의 감정에 대한 반응도 빨랐고 배려심도 많았다. 하지만 장기간 연애가 이어지고 결혼으로 발전하는 동안 그와 비슷한 많은 데이트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특별히 기억에 남지 않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같이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어딘가 놀러도 갔는데 첫 데이트만큼 애틋하고 아련하게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살다 보면 익숙해지니깐 자연히 그런 거겠지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분명 마음의 자세에서 오는 어떤 무뎌진 사랑의 현상인 것 같다. 내가 쓰는 마음의 크기만큼 함께한 시간이 애틋하게 기억에 남는다는 것. 일상 속에서 우리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 힘들 때가 많지만, 이렇게 여행을 떠나오거나 특별한 시간을 겪을 땐 그 마음의 크기가 커지는 걸 알 수 있다. 


지난 5년 동안 부산아쿠아리움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면서 많은 가족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주말의 피로감을 이겨내고 가족들을 위해 아쿠아리움에 왔지만, 피로감으로 또는 무관심으로 즐거워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요구를 받아주지 못하는 아빠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들의 표정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보단, 피곤해 죽겠는데 빨리보고 집에나 가자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혜택을 받는 아이에겐 아빠와 함께한 최고의 시간으로 기억될 수 있지만 아빠에게는 그렇게 기억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빠 왜 옛날에 어렸을 때 아빠랑 아쿠아리움에서 즐거웠잖아?”

“응? 언제?”


나중에 내가 아빠가 되었을 때, 이런 모습으로 가족들과의 시간을 대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오빠, 나 이 마트료시카 인형이 되게 갖고 싶은데 하나 사주면 안 돼?”

“그래. 무슨 색깔이 괜찮은지 같이 골라보자.”


우선, 감사하게 얻은 이 여행의 시간 동안 아내에게 마음껏 표현하자. 그동안 미처 표현 못한 내 안의 작은 사랑까지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울면서도 끝가지 타는 용감한 아이
"아빠 나 이거 탈래!"
아이스크림은 어른도 아이로 만든다
러시아도 다 사람 사는 곳 달라도 결국 같다.
하늘에 날리는 작은 방울들
마트료시카 인형을 사고 기쁜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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