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새벽 기상을 하고 제일 먼저 시를 읽었다. 수중에 한 권 시집이 없을 때다. 시동냥이라고 하는 나의 아침 구걸은 매일 #하루마음 님과 #글부자 님에서 했다. 우연히, 그때 필사해 놓은 시들을 다시 읽었다. 자신이 적은 것인지 의심이 간다. 쓴 행위는 기억나도 내용은 기억에 없다. 시가 뭔지 모르던 시기었다. 머리가 빠개지게 생각해야 겨우 한 줄 건졌다.(지금은 적어도 구조와 심상이 그려지는 수준의 읽기는 가능한) 다시 읽고 해석해 보면서 그 감회를 보충해 보련다. 이번에는 제대로 기억하길 바라면서.
어쩌다 나는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명랑한 햇빛 속에서도 눈물이 나는가
한눈에 보기, 읽기 좋은 구조다.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 마지막에는 ‘가”어미를 반복한다. 반복하는 시구는 독자들의 마음에서 반향을 일으키는 종소리와 같다. 여러 번 울리는 종소리에서 깨진 소리가 둔탁하고 거친 소리가 난다면 더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즉, 반복 시구의 선택은 신중해야 한다. 의미와 미적 요소를 동시에 갖춰야 한다.
어쩌다,라는 말에는 우연성이 있다. 부러 당신을 좋아하려고 한 게 아니라, 우연히 인연에 이끌렸다. 어쩌다,에는 다시 약간의 원치 않은 마음이 있다. 어쩌다가,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어 버린 상황에 대한 원망이다. ‘명랑한 햇빛 속’에서는 눈물보다 웃음이 더 쉽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눈물이 난다. 어쩌자고, 그러는가. 왜 하필, 햇빛 속에서 눈물이 나는가. 눈물을 흘리는 행위에도 원치 않은 시적 화자의 수동성을 담았다.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깊은 바람결 안에서도 앞섶이 마르지 않는가
바람결이 깊을 때, 깊게 후리고 들어오는 강풍에는 옷이 잘 마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섶이 마르지 않는다. 팔랑 팔랑거려 가장 잘 말라야 할 가장자리의 앞섶이 마르지 않는다는 말은 흐른 눈물이 앞섶을 적혔고, 그 슬픔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무수한 슬픔 안에서 당신 이름 씻으며 사는가
이번에는 “무수한 슬픔”이라고 분명하게 독자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 많은 슬픔은 이제 못처럼 고여서 이름을 씻을 만큼 불어났다. 이름을 씻는 행위는 오명을 벗는 것일 수도 있고,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행위를 일 수도 있다. 만약, 이 당신의 대상이 부모님이라면 평생, 그 더럽혀진 명예를 눈물로 씻어낼 수 없는 자식으로서의 화자의 심적 부담을 나타낼 수도 있겠다. 만약, 이 당신이 연인이라면 이별 후 사랑한 기억보다 이름만 남았다. 허무하게 사라진 기억 때문에 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여기서는 연인이 좀 더 잘 어울린다.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가득찬 목숨 안에서 당신 하나 여의며 사는가
불어나면 가득 찬다. 목까지 가득찬 물 속에서 가슴이 압박되어 숨을 쉬기도 어렵다. 꼴깍 숨이 넘어간다. 당신 ‘하나’ 그 속에서 오로지 당신이라는 존재, 한 명을 생각한다. 나의 이 고통의 이유는 오직 당신이다. 또한 내 사랑의 이유도 오직 당신이다.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어디로든 아낌없이 소멸해버리고 싶은 건가
당신이 여읜 후의 나의 고통과 존재는 무의미하다.
그럴 때는 스스로도 소멸, 아니 자멸해버리고 싶은 절망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아낌없이”라는 형용사에서 기꺼움이 느껴진다.
화자는 당신을 사랑하게 된 운명을 원망했다. 그 사랑의 결과로 고통을 겪고 희생하고 싶어졌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오지 않았던 슬픔과 고통, 동화와 그리움도 없었을 거다. 애초에 그 시작을 ‘어쩌다’에다 넣고, 나중의 ‘아낌없이’에 그 기꺼움을 보면,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나를 다 내어놓을 만큼 태도가 바뀌었으니깐. 소설은 주인공이 사건을 통해서 변화한다. 삶에서는 우연한 사랑 때문에, 주인공인 우리 자신이 변신한다. 이 시는 쉬운 구조에서도 점층적으로 슬픔이 고통으로의 전환을 보여줬다. 그 안에서 시적 화자의 변화도 단계적으로 보여줬다. 시는 읽기 쉽다. 그러나 슬픔은 중첩되고 시적 화자의 희생의 비장함은 극화되니, 여러모로 좋은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