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육호수
육호수 시인(1991년 출생)
2016년, 대산대학문학상 시 부문 수상 → 이를 계기로 작품 활동 시작, 시 전문지《창작과비평》에 등단
2018년, 첫 시집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아침달) 출간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평론가로 등단
2023년, 두 번째 시집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문학동네) 출간
이 시는 육호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이면서 시 제목이다. 보통 시집의 제목으로 붙인 시가 간판격으로시집에서 가장 뻬어난 경우가 많다. 또 시인이 중시하는 화두이기도 하다.
인터넷에 보면, 이 시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들이 있다. 충분히 공감한다. 이 시는 단번에 이해할 수 없다. 시를 분석해도 시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고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시를 읽는 독자들의 관점이 만나 시인의 시적 세계는 확장한다고 가정하면 읽으면 읽기가 자유로워진다.
이 시를 읽고, 내가 아닌 타인들의 죽음과 고통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한계와 그에 대한 저항은 물론 허무함을 느꼈다.
아쉬운 점은, 시는 시각적 감각과 시간적 흐름을 잘 드러냈지만, 낭독하면 툭툭 끊겨 음악적 리듬이 부족한 것 같다. “같다”라는 어미에서 흐름이 자주 끊겼는데, ‘같은 것’이 여러번 나오는 것을 의미상으로 해석해본다면 시적 화자는 아마도 어떤 확신을 하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낸 것이 아닐까.라고 짐작할 수도 있겠다.
※볼딕체가 시입니다.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금지를 부르지르는 자의 금지는 금지가 아닐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영원히 천사로 머물고 싶어하는 소년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순수하던 시절에 머무르기 희망하는 건 아닐까?
눈 쌓인 벤치에 버드나무
겨울 그늘이 내린다
벤치에 내려앉아 나는
펼쳐진 그림자 그물 속으로
시간을 풀어둔다
->시적 화자는 벤치에 앉아 우리를 추운 겨울, 눈 내린 풍경으로 초대한다. “버드나무 겨울 그늘”이라는 시어에서 밝은 기억이 아니라는 걸 짐작해본다.그늘은 사물의 그림자이고, 그림자가 펼쳐둔 그물은 햇빛 뒤에 남긴 어두운 기억이라는 것처럼 읽힌다.
응얼이며 어른거리는
가루눈 그림자들을
시간의 노이즈로 이해해보지만
나는 시간을 잘 모르고
하늘에서 얼굴로 다가오는
눈송이를 바라볼 때면
어디론가 날고 있는 기분이 든다
->시간과 그늘 그리고 나. 눈송이가 얼굴 위로 떨어질 때 우리도 가볍게 과거를 회상할 준비가 된다.
눈 맞지 않은 벤치들은
어김없이 새똥을 맞았다
그건 겨울새들이
눈을 피해 잠들기 때문인 걸까
잠 속에선 새가 되곤 하지만
새의 잠을 알 순 없고
->눈(雪)은 시선의 은유로도 읽힌다. 눈 쌓이면 그늘이 되고, 눈을 안 맞으면 새똥을 맞는다. 결국 어느 하나도 눈과 뗄레야 뗄 수 없다. 시적화자를 벤치라고 하면, 눈이 쌓은 벤치와 새똥을 맞은 벤치로 갈린다. 눈은 새똥보다 가볍다. 새똥은 기분 나쁘고 더럽고, 또 그 우연성이 있다. 어쨌거나, 눈을 벗어날 수 없다. 노이즈는 소음이 아니다. 지난 시간들이 노이즈, 노이로제와 닿아 있는 시어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로 이해할 수 있다.
모래톱 위엔 엉켜 언 발자국들
가장 선명한 발자국이
날아가기 전
마지막 구름발일지 모른다고
적고 보면
새 발자국 같은 활자들
주인 없는 발자국에 발을 대고
몸을 눌러본다
->새는 눈처럼 우연성이 있고 자유롭다. 자유로운 새들의 마지막, 흔적을 따라해보는 행위는 시적 화자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시도처럼 보인다.
지난 여름밤 산책에서
밟을 뻔했던 쇠살모사는
무사히 겨울잠에 있을까
한 발짝 늦게 멈췄다면 물렸을까
발목에서 새어나와 방울로 떨어지는
시간이 멈춰 고이는 곳
얼어붙은 여울의
얼어붙은 물결을 살펴본다
->겨울에서 여름을 떠올린다. 그 여름 밤에 살모사에게 물릴 뻔 했던 기억은, 위험한 순간에 처했던 기억이다. 시간이 어긋나서, 그런 위험을 비켜난 경험을 가리킨다고 보자. ‘살모사에게 물렸더라면’의 가정. 만약에 그랬다면, 그 기억과 시간이 지금의 얼어붙은 여울처럼 차고,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여울에 얼어붙은 물결은 이제 어쩔 수 없는 시간들처럼 보인다.
여러 가로등 사이를 걸을 때면
여러 그림자를 갖게 되어
시간을 아주 많이 번 기분이 든다
그림자들은 나를 각인한 오리들 같다
모래톱을 움켜쥐고
누운 채로 얼어붙은 수초들
아주 많은 주검 같아서
앞에 선 나는
전투가 끝난 도시의 시계탑 같다
시간을 흘리며 정확해진다
죽음이 내 것 같다
->내가 아니었지만, 나를 비켜간 위험들이 닿은 다른 불운의 주인공은 “모래톱을 움켜쥐고 누운 채로 얼어붙은 수초들”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될 수 있다는 가정을 하면, “죽음이 내 것 같다”에서처럼 그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화자 또한 그 고통에 공감한다.
물끄러미
죽음이 나를 견디다 간다
기척이 사라지면
나의 각인은 죽음이었다
라고
허공에 찍힌 날개 자국
받아 적는다
하얀 핏금들
그러나, 그런 기억을 연상 시키는 사물들의 기척이 사라지면, 내가 각인하는 그들의 죽음이 사실은 무의미한 죽음처럼 허공으로 사라져 간다. “하얀 핏금들” 그런 죽음들이 하얗다는 것은, 시적 화자가 어쨌든, 그 죽음과는 엇갈린 생(살아있다)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그런 타인의 죽음과 고통에 대한 인식들이 작은 ‘금’일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보여준다.
이 시는 죽음과 시간. 그 시간 속에서 시적화자는 우울했고 힘들었다는 심상을 전해준다. 그렇다면, 그 죽음과 시간은 나와 대상 사이에서 어떻게 각기 자리 잡고 있는가. 신형철 평론가는 우리가 똑같은 고통을 겪어볼 때만 타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즉, 내가 아닌 타인의 죽음과 고통을 관찰자인 나는, 그것들을 단지 여름날에 발생한 하나의 기억으로만 기억할 수밖에 없다.
그 시간은 제목으로 돌아간다.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영원, 소년, 천사이라는 단어 모음은 시적 화자의 소년이었던 시간을 ‘영원’히 금지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세 번이나 반복하는 ‘금지’가 반어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영원히, 천사 같은 소년을 지지하겠다는 말로. 그 시간 속에서만 살아있는 누군가에 대한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이 시에 남아있다.
금지. 그런 시간들은 금지인 것일까?
하얀 핏금들, 나를 스쳐간 죽음의 기억.
그걸 기억하는 자, 피했던 자의 삶.
그걸 상기하는 자의 삶은. 그때의 그 금지.(실제로 금지를 말한다) 그걸 상기하면 안된다고 금기하는 것으로부터 조용히, 그걸 생각해본다. 나의 삶도 죽음과 결국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
이 시는 시간과 죽음을 따라가는 시적 자아가 ‘나’가 아닌 타인의 고통을 응시하며 느끼는 무력감과 동시에, 그 기억을 되새김질하려는 의지와 저항 사이를 오간다. 죽음을 ‘견디다 간다’고 말하는 화자의 목소리에는 고통을 직면하지 못하는 존재로서의 연약함과, 그러나 그 고통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시적 윤리가 동시에 담겨 있다.
그래서, 반복된 ‘금지’는 단순한 억압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금지되었기에 오히려 오래도록 머무는 그 시간과 이미지. 이 시는 그 시간을 견디는 자가 되기를 결심하는 순간의 기록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