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청혼>
진은영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의 시를 겨우 몇 편을 읽고 ‘어둡고, 어렵고’라는 두 가지 인상을 남겼지만, 적어도 이 시는 아름답고 슬프게 다가왔다.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라는 문구가 <청혼>이라는 시의 주제를 알려주는 제목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
물론, 이것은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에 대한 시적 화자의 구체적인 방법이라, 사랑의 서약의 의미인 ‘청혼’의 일부분일지라도,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는 거리를 걸을 때나, 사랑할 때나 둘 중의 어느 어중간한 거리에서 되뇐다면 퍽 어울린다. 과연 이런 것이 시적이다.
한동안 한남동, 인사동, 경복궁 길 등 오래된 거리를 걸으며 나도 사랑하고 너도 사랑해 보겠다고 시어를 빌리어 낭만에 젖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슬픔이 담긴 물컵을 보기 전까지.
*시 전문을 읽어야 시를 잘 읽을 수 있어서 전문을 싣습니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도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는 법이란 무엇일까.
오래된 거리의 익숙함일까. 그 허름함을 말하는 것일까.
질문을 던지고 읽어보자.
남자는 상대에게 세 가지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1.‘손바닥을 두드리는 비’ - 화자가 감동하는 순간, 환희했던 순간들이다.
2.어린 시절의 순수한 자신 - 어린 시절은 당신이 모르던 과거이기도 하며, 동심이기도 하며 진실한 자신이기도 하다.
3.자신을 찾기 위한 시간 - 자신을 찾기 위한 시간은 얼마나 지루하고 긴 시간인지는 겪어 본 사람들은 안다. 아직도 진행 중이고 죽을 때까지 못 찾을 수도 있다.
남자는 그 시간을 준다고 한다.
이 세 가지가 그가 가진 모든 것이다. 즉, 내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겠다는 다짐처럼 들린다.
즉, “오래된 거리”는 익숙하고 낡고, 그런데 절대로 사라질 것 같지 않은 공간에 대한 가치를 말한다.
오래된 거리에서 우리는 고적함을 느낀다.
외롭고 쓸쓸한 우리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거리에서 시간을 껴입은 공간에서 위안을 찾듯이 그렇게 사랑하겠다는 맹세.
그런 사랑의 결심 뒤로,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이 벌들처럼 웅성거린다.
시적 화자와 무척 가까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더라도, 나는 그것에 관여하지 않겠다. 고 마음을 굳게 먹는다.
다시 한번, 귓속에 들어온 것처럼 웅성거리고 딴 말을 하는 사람들, 타인들의 그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나는 벌처럼 웅성거리는 인류(사람들)에게 구애되지 않고 쓰디쓴 잔을 비우는 흑기사가 되겠다고 한다.
이런 결심과 맹세보다 더 좋은 청혼이 어디 있을까.
흑기사처럼,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마시는 용기.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세인들이 어떤 욕을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위해 희생하겠다.라는 말을 이렇게 어렵게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연을 잘 들여다본다.
물컵에 담긴 유리 조각은 보일까.
물을 비운 후에야 이리저리 돌려 본다면야.
슬픔은 외부에서 보았을 때 투명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이해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슬픔의 진짜 속성이다. 또한 ‘유리 조각’이다.
유리 조각이 담긴 물을 잘 못 마셔서 유리조각을 삼켰을 때의 고통을 생각해 보라.
‘슬픔’으로 찬 물컵은, 우리를 다시 오래된 거리로 돌려보낸다.
늘 그랬던 것처럼 쓸쓸하게 남아 있는 오래된 거리에.
누구를 그리는 마음으로.
만약에 이 시가 누군가를 잃은 시라면(세월호 사고와 관련한) 우리 마음이, 그 자리에 항상 거기에 머물 것이라는 변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오래된 거리’가 상징할 수도 있겠다.
다시 돌아보자면, ‘어린 시절’ ‘작은 은색 드럼’ 등에서 들려오는 심상에서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님 애절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부모의 마음이 된다면, 영원히 잊지 못할, 잊지 못하는 그 시간을 모두 오래된 거리에 묻는다.
그러면 이 시는 청혼(請婚)이 아니라, 초혼(招魂: 사람이 죽었을 때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이 될 것이다.
시란 이렇게 제멋대로 시작해서, 제대로 끝 맺힐 수도 있구나.
시란, 뜬금없이 시적이고 낭만적이라고 꿈을 꾸듯 하다가도 목울대를 치고 오르는 슬픔도 전해준다.
아, 시는 성급을 말며, 깊이 깊이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