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를 태우며, 허수경
포도나무 잎, 포도 가지, 포도 꽃, 포도알, 포도주 등.
포도에서 파생되는 많은 말들 중에서 시인은 ‘포도나무’를 택했다.
나는 이 포도나무가 시적 자아의 삶 전체라고 느껴진다.
시인은 포도나무를 태우는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그 계절은 가을이거나 가을처럼 카디건을 걸치지 않고는 머플러를 목에 두르지 않고는 나갈 수 없는 그 우중충한 독일 날씨에 잠시 햇살이 비쳤을 때 본 장면이라고 상상해 보자. 포도나무를 태운 흰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바람이 불어 그 연기가 얼굴에 스치면서 마른 잎과 나무 타는 냄새가 난다.
시인은 시상을 주변에서 찾았다. 포도나무(를 태우며), 공원(차가운 해) 기차(는 간다), 저(나비). 시인은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기어 올리는 우물가의 아낙네가 아닌가. 일생, 매년, 포도라는 과실을 맺으려던 포도나무가 타는 것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가을 정서처럼 스산하고 적막하다. 그 계절은 적응하기 어려운 시간임이 틀림없다. 일년을 지나고 다시 온 가을이 또 낯설다.
※ 볼딕체가 시 원문입니다.
포도나무를 태우며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허수경, 문학과 지성사, 2016년))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있다가 순식간에 멈춰버린 시점을 포착한 것 같다.
연속적이다 어느 순간 멈춰버린 그런 죽음 같다.
사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살았습니다
삶과 죽음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는 시간.
그건 노년이 아닐까.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이 늙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 상황을 해결할 보험이 없다는 것은 더이상, 믿을 구석이 없다는 허망함이 느껴진다.
너덜너덜 목 없는 빨래처럼 말라갔습니다
목 없는 빨래. 티셔츠를 쫙 펴서 빨랫줄에 널어놓으면, 그것은 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형태, 주인의 허물처럼 보이기도 하다. 실체가 없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알아볼 수 있어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까
기억할 수 있는 시간과 그 속의 사람들, 그리고 애틋한 감정과 따뜻하게 온몸에 전해지는 감정을 느껴며 살아왔느냐고 묻는다.
시인은 ‘그럼에도 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조용히 되묻는다. 질문은 허무로 닫히지 않고, 계속 열린 채로 남아 있다. 포도나무가 그 오랜 세월 살아남다가 어느 순간 죽어버리는 완전히 다른 상태로 변해버리는 것처럼, 우리 삶도 그런 좋은 기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그게 다잖아.라고 확정하고 묻는 것 같다.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아 있습니까
사(死)을 생각하는 것은 생(生)을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한 후에야 삶이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서있기와 앉아있기, 삶과 죽음 사이로 대결 구도를 만들었지만 사실 그들은 별반 차이가 없다. 이파리를 떨군 포도나무는 죽은 듯 보여도 이듬해 성실히 가지를 뻗고 포도를 맺는다.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울분, 답답함을 갑자기 터트릴 만큼 우리는 격하게 울부짖을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 그건 무엇일까? 살아 있는 것 아닐까. 뜨거운 감정이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가시밭길을 걸었던, 모난 자갈 길을 맨발로 걸었던, 마른 가지와 풀을 걸었던 발은 상처투성이 일 것이다. ‘발이 혼자’는 ‘목 없는 빨래’처럼 그림자도 없고 주체가 없는 그런 부차적 존재로 보인다. 우리는 그걸 어디다 두었을까. 그림자는 뒤에 가만히 서 있는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는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다시 한번 시인이 묻는다. 오랜 세월의 포도나무가 포도나무로 존재하기 이전에 과연 포도 나무라는 것이 존재하였는가? 아니다. 그리고 그렇다. 포도나무 시간 전에 연속적인 무엇인가 있어야 포도나무가 존재한다. 그래야 포도나무 전의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포도나무의 시간은 곧 나의 시간이고, 타들어가는 시간은 늙어감을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죽음으로 전속질주하는 순간이다.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다시 한번 묻는다. 두 별 사이에는 죽음과 삶 말고도 시간과 기억이 존재한다.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화장(火葬)당하는 포도나무, 그것을 어떤 의식도 없이 바라보니 ‘술 없는 음복’이다. 장례식을 그냥 보내는. 즉 이것은 포도나무에 자신을 빗댄 시다.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가을달이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장례식으로 전속력으로 날아드는 자신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인식 전환이다. 포도나무가 타들어가고 재로 변하듯 우리도 그쪽으로 급속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
화자는 폭우처럼 질문을 내린다. 어떤 원망도 들어있다. 왜, 우리는 그런 운명인가요? 왜 우리는 그래야 하나요. 질문은 필연적으로 답을 불러오고, 우리로 하여금 '포도나무가 타기 전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생각케 한다. 그런 질문들이 끝끝내 ‘알아볼 수 없지만',초라하지만 그래도 가을 달은 깊으니, 각자가 ‘알아볼 수 있는 대로’ 사는 게 깊어지는 가을 달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시인은 한참 생각에 빠지게 하다가 마지막 한 줄로 다시 지금에 시선을 돌린다.
‘가을 달이 지고 있습니다
포도나무에서 달로.
죽음에서 계절로.
머무르던 생각을 다시 살고 있는 자리로 돌려놓는다.
담담한 음조로 '삶은 원래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