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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째 삼키는 삶

럭키슈퍼, 고은경

by 원더혜숙


먼저, 시 제목에서 냉소적 농담을 꺼낸다. 정말 행운이 깃든 걸 럭키라고 생각한다면, 럭키를 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자의 상대적 차이와 그렇지 않는 자의 박탈감은 존재한다. 시의 화자는 운좋은 럭키 슈퍼 주인이 아니라, 슈퍼 평상에서 풍선껌을 사서 부는, 널널한 하루를 통과하며 그 상대적 박탈감과 운 없는 청년이다. 시는 그의 청년의 현실과 그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 어쩌면, 운 없는 자로 살아야 하는 숙명적 희망까지 가진 걸로 읽으면, 농담을 잘 먹는 게 될까.


농담을 열매라고 생각해 보자. 그것은 껍질째 먹을 수 있는 과일이라고 한다. 껍질째 먹는 과일은 사과, 감, 자두, 복숭아 정도의 과일이 되겠다. 껍질이 얇아 과육을 베어물면 식감을 더해 주어 걸리지 않는다. 여기에, 떨어진 홍시도 아니고 ‘버려진 홍시’(익었지만 떨어진)를 쪼아먹는 까마귀가 있다. 그런 껍질째 먹는 과일과 껍질이 얇아진 홍시, 낙과처럼 먹기 쉬운 과일은 세상에 없다. 그런데 어쩐지 낙과는 상품으로 팔 수는 없다.


화자는 럭키 슈퍼 앞 평상에서 풍선 껌을 씹으면서 열매를 세어본다. 나무가 한 해 동안 꽃을 피우고 설익고 썩은 것들은 떨어뜨리고 남긴 열매들. 그건 나무의 성과(成果)다. 그런데, 낙과가 맛있다고 한다. 그때, 화자 자신은 아직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견실하고 맛있게 잘 익은 열매이기보다는 낙과에 가깝다. 울며 겨자 먹기로 낙과가 맛있다고 애써 우겨보는 것이다. 팔 수는 없지만 맛있는 낙과인 자신을 긍정해보려는 태도다.




럭키슈퍼

(고은경,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생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매일 걷는 골목을 걸어도 여행자가 된 기분인데요

아차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바람이 불고 머리 위에서 열매가 쏟아집니다

이게 다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 말이죠



씹던 껌을 껌 종이로 감싸도 새것은 되지 않습니다



자판기 아래 동전처럼 납작해지겠지요 그렇다고

땅파면 나오겠습니까?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이 모든 게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노력해도 이미 씨앗부터 달라 그 노력만큼의 성과를 맺지 못하는 현실이 거짓이었으면 좋겠다. 사과 한 알의 세계는, 사과나무가 키워내 온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장석주 시인의 싯구 “대추 한 알”처럼. 그것만큼 크게 풍선 껌을 분다. 꿈은 그만 터져버린다. 그 짓을 들킨 게 부끄러운 듯이 숨긴다. ‘세계의 단물’은 꿈을 크게 꿔도 되고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한 어른들의 달콤한 거짓말이다. 그 단물을 먹고 성장한 나는 더 이상 세상의 감언이설에 속지 않을 거라며 깨어난다.


현실은 그렇다. 슈퍼 사장님은 자신의 중학생 동창의 부모님, 그녀는 대기업에 다니고, 자기는 평상에 앉아 껌을 씹는다. 화자는 대기업에서 나오는 감미료 맛을 안다. 음식을 맛있게 해주는, 그 속임수. 감미료. ‘대기업은 농담 맛을 알까?’ 대기업은 그런 농담 같은 현실을 알까? 알지만 모르는 척하지 않을까. 그러니깐, 대기업들이 판을 치고, 작은 슈퍼들이 폭삭 망하고, 또 그 아래, 흙 수저를 가진, 씨앗이 부실할 청년들의 앞길은 낙과처럼 맛은 있지만 떨어져, 까마귀에게 물어 뜯긴다. 그건 농담이 아니고 진담이다.


껍질째 삼키는 행위는 무엇일까? 현실이다. 현실을 울며 겨자 먹기로 삼킨다. 껍질째 삼켜도 소화를 잘 해내는 흙 수저의 능력이 안쓰럽다. ‘우리도 말랑한 알맹이만 먹을 수 있거든요!’ 좋은 씨를 타고나지 못한 죄로다가. 그걸 감내해야 한다. 자주 벗겨지는 헐렁한 양말은 번거롭다. 아예 벗어버리는 게 낫다. 맨발은 자주 가난으로 상징된다. 여기서는 기반, 빽, 학벌, 혈연의 단단한 지원이 없는 흙수저들과 사회 취약층의 상징이다.


이 모든 것이 씨앗에서 시작되었다. 좋은 씨앗, 처음부터 잘 자라고 빨갛게 익을 수 있는 유전자는 있었다. 그래서, 시에서 한 번 전환한다. 여름이 다시 오면, 껍질째 먹을 수 있는 자두를 심어서 그걸 껍질째 먹는다. 그걸 소화해낼 능력이 있으며, 겉과 속의 구분이 적은 그런 과실, 누구에게도 공평해 보이는 그런 과실. 만약에 그런 과실을 심는다면, 그러면 좀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까. 씹던 껌 말고, 새 껌을 꺼내 씹듯 껍질째 먹는 과일을 심어서, 먹는 꿈을 꿔본다.




"자판기 아래 동전처럼 납작해지겠지요"에서 나의 납작해진 모습은 김사인의 <바짝 붙어서다>를 연상시킨다. 수조의 엎드린 늙은 가오리처럼, 나는 자판기 아래 납작해진 동전을 꺼내 세상의 빛을 보여줄 것인가.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나라는 사람이 풍선껌을 세계만큼 부풀려 보듯이, 그런 꿈을 꾸고 현실을 바꾸는 일이 가능할까. 행운을 납작 엎드린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일이 가능할까. 가능하길. 그게 모두 운에 달렸는가? 아님 내게 달렸는가.


“그래도 소화 다 되거든요.”라는 말이 귓가에 남는다. 껍질째 먹는 소화력은 농담 같은 현실을 삼켜야 하는 우리들의 생존 방식이다. 웃음 뒤에 씹히는 쓸쓸함까지, 우리는 다 삼킨다. 그러니까 농담은 끝나지 않는다. 껍질 째, 지금도 씹히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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