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글을 읽어 오신 분들은 영유에 대한 나의 애증을 느끼실 수 있으셨을 것 같다. 초기에는 너무 많은 학습량을 보면서 어른도 이만큼 공부하기 힘들겠다라는 생각에 내가 나쁜 짓에 가담하고 있는 건 아닌가 고민이 들 때도 있었다. 그렇게 괴로워 할 때 어떤 선배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선생님,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현장을 떠나지 않고 이 아이들 옆에 함께 있어주는 거예요.”
그런 번뇌의 시간을 통해 자칫 무거워 질 수 있는 학습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커리큘럼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한들, 공부 무게를 줄이고 조금만 선행을 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 진도는 초등학원 수준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영유에서만 각성한다고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기도 하다. 다만, 지금도 현장에서 많은 관리자들이 고민하듯이 선행을 하되 어떻게 효과적으로 또 즐겁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이어져야 할 것이다.
영어유치원에서 친구들이 얻어가야 하는 것은 미국 교과서 어디까지 했다는 훈장이 아니라, 원어민과 많은 시간 함께 했다는 경험치라고 생각한다. 많은 분들의 영어유치원을 보내시려는 이유도 분명히 시작은 다음과 같다. 한시라도 어릴 때 원어민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고, 원어민의 발음을 받아들이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다만 현장에서는 끝내야 되는 책들이 많아서 스케줄이 타이트한 만큼 수업내용 외에 다른 이야기를 원어민선생님과 나눌 시간이 친구들이 원하는 만큼 있기 힘들다는 점이 아쉽고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친구들은 계속해서 선생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계속 발표를 하고 싶어 손을 든다. 그런 태도가 너무 대견하고 고맙긴 한데, 매 번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 듣다 가는 수업시간 내에 오늘 진도를 못 마치게 되기 때문에 선생님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끊게 되실 때가 있다. 선생님이 냉정하시고 친화적이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 진도를 못 끝내면 그 또한 우리에게는 직무유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유치원의 대체 불가 장점은 원어민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어유치원을 선택하셔서 얻을 수 있는 점이 있다는 것은 다른 것을 얻을 기회에 대해서는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야기 들을 이번 장에서 이어가 보려고 한다.
첫째로, 영어유치원은 영어만 가르친다. 우습지만 우리는 아이들이 한국어를 잘 하거나 바르게 쓰는 거 보면 신기해 한다. 영어로 말하고 영어로 쓰는 것만 보다 한국어 쓸 일이 생기면, 우리 입장에서는 가르친 적이 없는 것을 이 아이가 하는 셈이니 놀라운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영어를 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한국어를 따로 가정에서 혹은 학습지로 배우지 않으면 그 또한 그 친구의 어려움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떤 친구는 영어유치원을 졸업하기 한 두 달 전에 아이가 한국어가 잘 안되는 것을 알고 충격 받으셔서 갑자기 영어유치원을 멈추시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는 영어가 잘 늘고 있는지는 두 눈을 뜨고 지켜보고 관리하지만, 한국어 성장에 대한 부분 까지는 체크해 줄 수 없다.
또한 영어유치원에서 충족되기 힘든 것은 신체활동이다. 학습식 영어유치원의 생활은 70% 이상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 시간으로 구성이 된다. 놀이터에서 3시간 풀어놓아도 집에 안 가겠다고 할 수 있는 나이의 아이들이다. 에너지틱한 캐릭터를 가진 친구들은 일단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성립되기가 어렵고 앉아 있어야 되는 동안, 계속 몸을 비틀거나 자신의 신체를 만지는 경우도 있다.
“계속 앉아서 공부하는 것 힘들지? 어떤 마음인지 선생님도 알아”
라며 마음을 읽어주면 펑펑 눈물을 흘리던 녀석들을 번쩍 들어서 안아 올릴 때면,그 작은 녀석이 가지고 있는 무게가 나에게 까지 전해져 느껴 지고는 했다.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난 다는 것은 놀이시간 혹은 자유활동 시간이 적어진다는 뜻이다. 즉 친구들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교류하고 때로는 다투고 풀어지는 이런 과정을 다른 교육기관에 비해 갖을 기회가 적을 수 있는 것이다. 인격 대 인격이 부딪혀 가며 혹은 마주쳐 가며 협동해가며 양보해가며 빚어가는 영역은 영어유치원에 오기 전에 형성되었으면 감사한 일이고, 혹 아니라면 시간 선상에서 뒤로 미뤄지는 느낌이 있을 수 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아이들이 아무래도 학습을 하다 보니 누군가는 느리고 누군가는 빠른 것이 감춰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때 빠른 친구는 빠른 친구대로 느린 친구는 느린 친구대로 아이들이 느끼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원어민 선생님의 지도 법에 따라 다르겠지만, 주어진 페이지를 다하면 친구들이 “I’m done” 이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나아가서는 내가 일등으로 다 했어 이렇게 응용되기도 한다. ‘저 다했어요,’ 라는 보고일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난 벌써 다했다’ 라는 말인데, 아직 어린 아이 친구들이다 보니 다른 친구들에게 그 말이 어떻게 들릴지 까지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경쟁심이라는 지점이 살면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6,7세가 그것을 받아 들 일 수 있는 영역인지는 아이에 따라 편차가 큰 것 같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낄지 생각해볼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서로를 소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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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기일 때 모두가 나만 바라봐 주는 사랑을 받다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 사이로 들어오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배려 라는 것을 받아보고 또 자신도 해보면서 함께 하게 된다. 나는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형성되는 따뜻함에 힘이 있다고 믿는 바이기에 아이들에게 이런 부분을 가르쳐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
교실에는 다양한 인격이 존재한다. 즉, 모두 친하게 지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실현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때로는 싸우거나, 누군가 때리고 맞은 상황을 다뤄야 한다.
“엄마가 이 상황을 보셨으면 뭐라고 하셨을 것 같아요?”
“둘이 입장을 바꿔서, 친구가 너를 때렸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나는 그 친구들에게 엄마의 마음, 친구의 마음을 읽어보라는 주문을 하고는 한다. 선을 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배우는 곳이 학교, 학원 등 단체 생활을 하는 곳이라면, 선이 무엇인지 배우는 곳은 가정이다.
언젠가 나는 교실에서 아름답게 자란 친구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내가 간식과 음료 통을 들고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때 그 친구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제가 문 열어 드릴게요.”
정말 너무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영어유치원에서 일한 이래로 제일 감동받은 날이었다. 그 친구는 선생님이 무거운 것을 들고 있어서 힘들겠구나 라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본 것이다. 정말 마음이 너무 촉촉해졌던 그 날, 몇 년 동안 일하면서 힘들었던 무게가 사라진 듯한 날이었다.
나는 교사로서 아이들이 실력이 늘고 시험 점수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가끔은 공부하는 것이 힘들다고 두 팔 벌려 꼭 안아 달라는 녀석들을 애정 한다. 일하고 있으면 내 등 짝에 매달려 오는 한 명 한 명에게 내가 내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생각해 보면 내 자식들보다 우리 반 아이들을 더 많이 안아주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매년 다 애틋한 스토리가 있는 아이들이다.
영유에 다니는 아이들이 위에 언급한 부분에 다 약하다는 것도 절대 아니고, 일반 유치원에 다니거나 어린이 집에 다닌다고 이 부분이 더 낫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단지 이러한 약점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부분정도는 영어유치원을 환상의 영역에 머물게 하지 않기 위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영어유치원의 원비가 적지 않다 라는 점에서 기대치가 높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완벽해 질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어릴 때 과자 선물세트를 구매하면 낱개로 과자를 산 것 보다 기분이 더 좋은데, 내가 안 좋아하는 과자도 가끔 들어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어느 날은 어떤 친구가 다른 친구한테 “Pig”라고 부르는 일이 발생했다. 아, 이 어감의 차이를 어떻게 지면으로 전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친구를 “야 돼지야” 라고 부르기는 엄청난 저항력이 있지만 “Pig”라고 말하는 것에는 거부감이 그것보다 덜한 그 느낌이 있다. 이걸 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영어로 말을 거칠 게 하는 친구를 교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한국말로 대화를 해보면 그렇게 거친 말을 쓰지 않는다. 한국말을 할 때 아이가 달라 보이기까지 한 이 현상을 나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을 때도 있다.
한 번은 어느 학군지 길가에서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학생 둘이 영어로 이야기를 유창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영어 잘하는 구나 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 친구들의 대화는 유창한 영어 욕이 절반이었다. 잘은 몰라도 그 친구들에게 지금 하고 있는 그 말을 한국어로 해달라고 부탁한다면, 민망해 하며 이야기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한국어를 예의 바르게 사용하지 않으면 주변 모두가 불편하고 민망하듯이, 영어도 그러하다. 말에는 인격이 담기게 된다. 요즘은 많은 분들이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상황에서 영어를 쓰게 되기 때문에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한다면 두 배의 책임감 또한 갖게 되어야 하는 것 같다. 두 가지 언어를 오고 가면서 지켜야 할 가치들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