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고 먹고 자도 괜찮은 이유
아무리 대기만성이라지만 얼마나 큰 그릇을 빚어낼 작정인지 나는 여전히 이룬 것이 없다.
막연히 서른이 되면 안정적인 경제적 토대를 갖추고 내 집에서 살며 내 차를 타고 여기저기 여행하고 취미 생활을 즐길 줄만 알았다. 하지만 현실 속 서른의 나는 부모님 집에 살며 모은 돈도 얼마 없이 놀고먹고 자는 게 취미인 백수다. 무언가 잘못된 걸지도 모른다는 경보가 들린다. 사회에서 권장하는 서른의 모습도 아마 나의 막연한 상상과 더 닮았을 텐데. 사회초년생의 티를 벗고 슬슬 안정적인 직장과 가정을 꾸려가는 건실한 서른. 그것이 모두가 바라고 종용하는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한 곳을 제시하는 사회와 그 방향으로 내달리는 대중 앞에서 나는 꼿꼿이 다른 지점을 가리키고 싶다.
어느 날 친언니가 나를 떠올리게 한다며 영상 하나를 보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으로 주인공 캐릭터의 이름은 코지코지였다. 하루 종일 도대체 뭘 하고 다니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코지코지는 하루 일과를 회상하며 천진난만하게 대답한다. 하늘을 날면서 놀고요, 산에서 과자도 먹으면서 놀고요, 바다에서도 놀고, 잠도 자요. 무해한 표정과 내용을 마주한 다른 학생들은 '수치심은 내 몫'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식은땀을 흘린다. 선생님은 뭐라고 할까. 놀고 먹고 자는 게 전부라고?! 황당 섞인 대노(大怒)에 코지코지는 갸웃한다.
도둑질도, 살인도 안 하고, 사기도 안 치고, 놀고 먹고 자는 건데 뭐가 나빠요?
코지코지의 당당한 대꾸에 말문이 막힌 건 선생님과 친구들 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따끔한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움찔 놀라며 입술을 '오' 모양으로 만들었다. 특히 마지막 반론에는 그동안 생각하지 못한 논리가 있어서 곰곰 생각해 보게 됐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행복하게 사는 사람에게 사회는 무엇을 탓할 수 있을까.
어디선가 이런 구절을 본 적이 있다. '우리는 생산성을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이 문장을 기억하는 이유는 대중이 따르는 무의식적인 통념과 다르고, 그만큼 새로운 사고의 틀을 깨우쳐 주었으며, 나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산을 위해 태어나거나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도 동물이며 동물은 자연의 일부다. 벌레도, 새도, 나무와 바람과 강아지도 전부 '생산성'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그들을 생산적으로 바라보고 이용하는 것은 지극히 인위적인 방식이다. 하물며 인간도 자연인데, 그 일부로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존재론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는 종종 우리에게 더 나아져야 한다고 강요한다. 공부하고, 배우고, 직업을 가지고, 가정을 가지고, 돈을 벌고, 사회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직간접적으로 주장한다.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생산성과 규칙, 그리고 개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하지만 건강한 사회의 기준은 무엇이고 개인의 노력과 희생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는 기회는 무척 중요하다. 우리가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지금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여기는 건 개인의 탓만으로 돌리기엔 매우 복합적인 결과이다.
경제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의 소득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의 50%가 태어난 국가이고 30%는 유전이라고 한다. 내가 어느 국가의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산의 8할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 이건 자산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해당된다. 암에 걸릴 확률도 돌연변이와 같은 우연적 요소가 50%, 유전이 30%, 그리고 환경이 20%라고 한다.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게 강조되고 개인의 책임 부담도 큰 사회에 살고 있지만, 정작 우리가 노력으로 해낼 수 있는 수준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단지 개인의 노력으로만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부정하고 싶을 뿐이다. 20대의 너는 어학연수도 가고 아르바이트와 인턴도 몇 번 해보고 연애도 하면서 다양한 도전을 하고 성장해야지? 30대의 너는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좋은 사람과 결혼도 해서 아이도 낳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야지? 40대의 너는 내 집마련도 하고 사회적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며 아이도 잘 키우는 맛으로 살아야지? 50대의 너는, 그리고 60대 70대의 너는... 이처럼 술술 외울 수 있는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들은 괴로움이 없을까? 늘 행복하기만 할까? 반대로 이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까? 늘 괴롭기만 할까? 그리고 그런 결과가 과연 개인의 선택과 노력만으로 결정된 걸까?
사회적으로 촉망받는 기준에 도달한 사람들이 쏟은 노력을 존중한다. 나는 가지 못한 길이기 때문에 그들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들을 존중하는 만큼 나도 '노력'하고 있다. 더 나은 삶을 열망하고 탐구하며 내게 좋은 것을 주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나의 열정과 재능을 살려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무엇일까 고민한다. 과거가 후회되고 현실이 걱정되고 미래가 두렵지만 노력한다. 관심 있는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고, 새로운 분야의 자격증에 도전하고 더 알아가고 싶은 분야의 책을 읽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거나 찾아서 먹고, 가족과 친구를 만나 소소한 이야기부터 철학적인 이야기까지 여러 주제를 나누며 돈독한 시간을 보내고, 내 심신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나를 기록하고 보살피며, 이렇게 글을 쓴다. 이런 노력들이 모여 내가 된다. 나다운 삶을 누리기 위한 나만의 기준인 것이다.
요즘 들어 살아보니 건강이 제일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나보다 오랜 시간을 살아본 존재들이 남기는 교훈을 곱씹어 본다. 나이가 들어서도 건강한 사람은 건강보다 다른 것이 제일이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모두 자기만의 기준으로 삶의 중요성을 나열할 것이다. 혹자는 몸을 망가뜨려가며 돈을 모은 것을 후회하고, 혹자는 몸을 사리며 돈도 모으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혹자는 제대로 사랑해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혹자는 사랑에 매달린 것을 후회할 것이다.
석기시대에는 일단 오늘 살아 남고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최고였고, 조선시대에는 장원급제하거나 관직에 오르는 것이 최고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사회적 기준은 사회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물론 나만의 길을 가겠다 결심했다고 해서 불안과 걱정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삶을 힐긋거리며 불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내 삶을 즐기며 나만의 의미를 만들어 가기로 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이 앞으로의 시간을 더욱 궁금하고 기대하게 만든다.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갖출 건 갖춰야 하는 나이 서른, 하지만 내 기준 아직 알아볼 삶의 모습이 많은 아기, 응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