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전시, 이머전시, 인생의 이머전시
최근 라디오를 듣는 게 소소한 재미다. 인생에 한 번씩 빈틈이 생길 때마다 라디오를 챙겨 듣는 기간이 끼어든다. 그 기간은 주로 시간이 붕 뜨거나 정신이 붕 떠서 축축하고 어두운 상태에 빠져있을 때였고, 그럴 때마다 라디오는 뜰채처럼 나를 우울의 늪에서 건져 뭍으로 꺼내주었다. 라디오에는 그런 힘이 있다. 바싹 말라 갈라진 땅 틈새에 촉촉한 봄비를 뿌려주는 힘. 라디오는 조잘조잘 사람 사는 이야기, 추억을 비추는 노래를 들려주며 하루 더 살아갈 용기를 준다.
주로 라디오를 틀어 놓고 할 일을 하는데, 그렇게 있다 보면 가끔씩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주인공의 바쁜 일상을 비출 때 흘러나오는 배경음처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이 마치 내 인생의 BGM처럼 들린다. 상상하기 좋아하는 파워 N이기 때문인지 이런 순간을 자각할 때마다 참 즐겁고 설렌다.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솟는다. 그렇게 애청자가 되어 가끔씩 사연과 신청곡이 선정되면 또 얼마나 짜릿한지. 라디오를 켜면 세상 사는 이야기, 잊고 지냈던 노래가 귀를 채워 심심하지 않다. 동시에 노동요를 틀어둔 것처럼 능률까지 올라가니 일석 몇 조인 지 셀 수도 없다.
요즘은 사주에 없는 조경기능사 실기를 준비하고 있다. 주로 생뚱맞게 뛰어들게 된 일에 대해 '사주에 없던'이라는 표현을 붙인다. 조경기능사도 예전부터 꿈꾸거나 눈여겨보던 분야는 아니었다. 어느 날 친언니와 먼 훗날 가족들과 함께 살 집을 직접 만들자는 꿈의 약속을 하며 언니는 건설을, 나는 조경을 맡기로 했다. 당장 몇 년 뒤 목표는 아니지만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두고 싶었고, 가장 기초적인 수준을 알아보다가 조경기능사 자격증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렇게 2년 전 충동적으로 필기시험을 봤다. 그리고 필기 합격의 효력이 사라지기 전에, 그러니까 올해 가을 안에 실기에 붙어야만 하는 운명이 됐다. 그리고 난생처음 그려보는 설계 도면을 슥슥 끄적이며 헤매는 동안 옆을 지켜주는 라디오가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때로는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이제 다 무슨 소용이 있는지, 당장 나가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할 나이에 노년의 취미 같은 걸 즐기고 있는 건 아닌 건지 지독한 현타가 온다. 하지만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라는 기회비용이 눈에 밟혀서 그만둘 수도 없다. 그만두고 싶지도 않다. 솔직히 완성된 설계 도면을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있어 보인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만큼 하고 싶다.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싶다. 흔한 고민과 흔들림, 그리고 불안과 걱정을 보풀처럼 일으킬 때면 라디오가 속삭인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 괜찮아. 우린 다 그런 면이 있고, 그건 나쁜 것도 틀린 것도 아니야. 다양한 삶의 모습이 들려오는 라디오는 개인 상담사도 아니고 해결책을 알려주는 답안지도 아니지만 알 수 없는 위로와 용기를 준다. 정말 요물이 따로 없다.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일상 한 줄을 나눠 듣는 것만으로 힘이 나다니. 이게 요술이 아니면 뭘까.
버튼 하나로 어디서든 켤 수 있는 라디오. 듣기만 하면 한 번은 웃음 짓게 만들고, 한 번은 가만히 멈춰 추억하게 만들고, 한 번은 인생의 배경음을 깔아주는 라디오. 내 삶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의식 위로 길어 올리는 이동식 행복 우물이 따로 없다. 그러니 지금 심심한 사람도, 외로운 사람도, 바쁜 사람도, 떨리는 사람도 모두 라디오를 켜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