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제 온라인을 곁들인
삽질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텃밭으로 쓸 터를 쟁기로 다지고, 괭이로 씨앗 심을 자리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판 다음, 원하는 작물 씨앗을 심어준다. 거대하게 잘 자라라고 물도 부지런히 뿌려주고, 작물들 행복하라고 말도 걸어준다. 영양분을 뺏어 먹는 잡초가 자라면 싹만 보고 구분해 미리미리 뽑아줘야 한다. 농사일하기도 바쁜데 허기와 체력과 정신력 관리도 해줘야 한다. 겨우 숨 돌리고 땀 닦을 때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사냥개 습격이다. 부랴부랴 전투 준비를 하기 위해 촉수 가시를 꺼내든다. 눈치챘는가? 이건 바로 게임. 유저에게 함께 굶지 말라고 당부하는 생존 모험 게임 속 이야기다. 그렇다. 요즘 나는 게임에 푹 빠졌다.
몇 주간 준비했던 조경 실기 1차 시험을 보고 왔다. 조경기능사 실기 시험은 독특하게도 1차와 2차로 나뉘어 각각 다른 날짜에 다른 종목을 본 다음 총점으로 당락을 결정한다. 1차는 조경 계획도 작성과 수목 감별, 2차는 작업 시공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사히 도면 설계와 수목 감별 시험을 마치고 이제는 2차 실기만 남은 상태다. 그러니 슬슬 연습을 시작해야 하지만, 시험이 끝나면 하루 정도는 놀아주는 것이 인지상정. 대학 시절에도 시험기간이 끝나면 PC방부터 달려가던 버릇이 있어서인지 졸업을 하고 나서도 시험이 끝나면 종종 기분 전환 겸 보상을 위해 게임을 했다. 그런데 계시처럼 이 게임이 생각난 건 운명의 장난인지, 무의식의 이끌림인지.
일이 년 전 한창 했었던 '돈스타브 투게더'라는 게임을 오랜만에 다시 하고 싶었다. 허허벌판에서 한두 개의 아이템만 들고 태어나 세계를 개척하며 살아남아야 하는 게임이다. 할 수 있는 일도, 할 일도 참 많은 게임이다. 그런데 그 많은 가능성 중에서도 나는 홀린 것처럼 삽을 들었다. 정작 삽질 연습을 해야 할 본체는 컴퓨터 앞에서 무한 클릭을 하며 거북목이 되어가고, 게임 속 내 캐릭터만 밭일과 조경에 잔뼈가 굵어지고 있다. 시험공부 안 하고 지금 뭘 하는 건지 내가 봐도 내가 웃기다. 웃기지만 게임을 하다 보니 실제로도 삽질부터 수목 식재까지 모두 잘 해낼 것만 같은 기묘한 자신감이 생긴다.
일단 배곯지 않고 살아남아서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이 게임은 특성을 보면 알 수 있듯 자유도가 매우 높다. 생존이라는 기본만 챙기면 나머지는 유저가 원하는 대로 원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처럼 농사에 빠져 밭일과 가사를 책임질 수도 있고, 함께 플레이하고 있는 내 친구처럼 지도를 넓히며 도장 깨듯 보스몹들을 무찌르고 다닐 수도 있다. 한참 플레이하다 보니 문득 이 게임이 우리 인생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의식주를 챙겨 살아남은 상태로 하고 싶은 걸 정해서 단계별로 해나가는 것. 농사가 질리면 양봉을 할 수도 있고, 콧바람을 쐬며 벌목이나 채광을 할 수도 있고, 그것마저 질리면 바다로 모험을 떠날 수도 있는 것.
그뿐만이 아니다. 종종 예기치 못한 재난이 우리를 덮치기도 한다. 비 오는 날엔 벼락에 맞아서 짜릿하거나 여름엔 땅이 푹 꺼지기도 하고, 정성껏 지어놓은 베이스캠프로 거인이 찾아와 묵사발로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든 일단 해치운 뒤 초토화된 집을 보고 실제로 재앙을 만난 것처럼 잠시 멍하게 있다가 묵묵히 재건하기도 한다. 이런 세상이 사람 사는 지구와 다를 게 뭘까? 누군가는 게임에 강제적이거나 특정한 목표가 없어서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재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정답이 없는 인생을 살며 무엇을 해야 할지 가닥이 잡히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땐 하나씩 조금씩 마음이 끌리는 방향으로 가다 보면 손에 자주 잡히는 집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냥이든 농사든, 공부든 운동이든 열심히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게임은 일시정지가 가능하다. 질리면 종료 버튼을 누르고 나가 처음부터 없었던 세상인 것처럼 삭제할 수도 있다. 인위적인 모드를 깔아 지름길로 갈 수도 있고, 망했다 싶으면 롤백이라는 기능을 써서 며칠 전으로 시간을 돌릴 수도 있다. 끝이 아니다. 치트키를 써서 원하는 물건을 '뿅'하고 얻을 수도 있고 무적 상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확실히 재미가 떨어진다. 이렇게 손 안 대고 코를 풀 거면 게임을 왜 하는 걸까 '현타'가 오기도 한다. 역시 고생 끝에 오는 낙이 가장 달콤한 건가, 'No Pain, No Gain'이라는 진리를 떠올려본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이 있더라도 결과로 나아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과정 없이 무언가를 얻으면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고 가치는 빛이 바랜다. 우리 삶이 비록 게임처럼 늘 재밌을 수도 없고 치트키를 사용할 수도 없다고 해도, 그 과정을 묵묵히 견디고 건너보자고 다짐한다. 그렇게 쌓인 과정 끝에 맞이하는 결실은 그만한 값어치가 충분할 테니까. 그러니까 오늘도 이세계(異世界)에서 밭 한 번만 갈고 돌아와서 시험공부 마저 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