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궁수인가요, 마법사인가요?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 지구와 태양계, 그리고 우주가 전부 게임의 일부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난 글에서 화두를 던졌다. 이 논의의 시작과 과정은 허무맹랑하고 난해할 수 있지만 그 끝에 도달한 결론은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발칙한 질문의 대답을 이어서 적어보려 한다. 모든 논의에 앞서 이 글은 우리가 게임 속을 살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를 참으로 전제한다. 스포 하자면 음모론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 게임 속에 살고 있는 거라면 선택지는 크게 두 개로 나뉠 것이다.
하나, 게임 밖으로 탈출한다.
둘, 게임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첫 번째부터 살펴보자. 가장 어렵고 허황된 부분이기 때문에 바로 두 번째 선택지로 넘어가도 좋다. 첫 번째 선택지의 경우 탈출할 수는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탈출할지 방법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도, 탈출 후가 관건이다. 실험실을 탈출한 생쥐 혹은 게임기 밖으로 나온 캐릭터를 상상해 보자. 생쥐는 다시 연구원의 손에 잡혀 실험실로 되돌아가거나, 거기까지도 실험의 일부일 수 있다. 운이 좋으면(?) 탈출에 성공해 연구실로 영영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평생 연구실에서 태어나고 자란 생쥐가 야생에서 부귀영화는 고사하고 희망적으로 생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게임 캐릭터는 어떨까? 컴퓨터 속 차원에서 방정식이나 코드로 구성되어 있던 존재가 원자들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현실 차원으로 이동할 경우 존재 자체가 와해될 가능성이 크다. 만화 속 캐릭터가 화면 밖으로 나올 수도 없지만, 나오려고 한다면 그 순간 증발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차원 이동에 성공했다고 치자. 제작자와 같은 차원에 존재할 수 있다면 그 이후의 문제는 우리 차원에서 이해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생쥐가 우연히 인간의 뇌를 가지고 인간 사이에서 살아가는 경우를 상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인간이 된 생쥐가 옛 친구였던 생쥐들과 소통할 수 없는 것처럼, 게임 밖으로 나가 그곳의 규칙에 적응한 존재에게 게임 속 생활과 규칙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게임 밖 세상으로 발을 디딘 선구자로서 고향의 종족들에게 탈출법을 전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소통이 되지 않을 것이고, 소통을 위해 인간의 뇌로 돌아간다면 제작자의 뇌로 했던 생각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떠올리고 설명한다고 해도 우리는 인간의 몸으로 게임 밖을 체험할 수 없으므로 선구자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전 세계 전광판에 한날한시 '이곳은 게임 속이다. 탈출하라.'라는 글자가 떠올라도 우리는 음모론 집단의 해킹 정도로 치부할 테니 말이다. 또는 탈출법을 전달하는 대신 할리우드 히어로처럼 홀로 제작자들과 맞설 수도 있다. 그들이 우호적 일지 적대적 일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하겠다.
정리하자면, 게임 밖으로 탈출하는 방법도 알 수 없지만 탈출한다고 해도 우리는 사라지거나, 되돌아오거나, 방랑자가 될 것이다. 운이 좋으면 게임 밖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갈 수 있겠지만 그때의 문제는 더 이상 우리의 배경지식으로 이해하거나 대비할 수 없다.
복잡한 논의는 끝났다. 이제 두 번째 선택지를 보자. 다소 어지럽고 뜬구름 잡는 소리 같지만 그럼에도 첫 번째 선택지가 끌린다면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두 번째 선택지를 고를 것이다. 발칙한 상상은 재미로 남겨둔 채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아갈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사실 현실의 선택지는 이것뿐이다.
이곳이 게임 속이라면 우리는 플레이어든 NPC든 체스말이든 게임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게임의 모든 요소는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무엇에 필요할까? 게임 진행, 즉 게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제작자의 목적이나 목표를 알 수 없다. 우리의 삶이 하나의 실험인지, n번째 서랍에 저장된 데이터인지, 꼬마 외계인이 현질로 추가한 요소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주체적인 플레이어로 살아가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자동차의 작동 원리를 모르는 사람도 드라이브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게임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존재하는지 이해하지 못해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처음부터 지니고 태어난 것이다. 이곳이 게임 속이든, 제작자의 의도가 무엇이든 달라지지 않는 건 우리가 고유한 기질과 신체,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게임에서도 궁수는 활을 가지고 태어나고, 탱커는 방패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도 각자 무엇 하나 특출 나게 빼어난 구석이 분명히 존재한다. '현질'로 추가한 집과 자동차, 각종 의상을 빼고 덜었을 때 남는 타고난 심장. 그것이 우리가 진행 중인 게임의 목적이자 삶의 목표와 긴밀한 관계가 있으리라 믿는다.
게임에서 중요한 힌트를 발견하거나 엔딩에 이르면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설렘과 아쉬움, 기대와 두려움 같은 감정이 퐁퐁 솟는다. 당신에게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떠올리면 가슴이 떨리고, 앞에 서면 손끝은 찌릿하고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사물일 수도 있고 사건이나 상태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런 감정을 타고난 나침반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고 내 마음의 방향이 가리키는 곳으로, 내 안의 탐지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나로 태어나 살고 있는 나름의 이유와 방법이 점점 선명해질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이 게임 속이라면 최선의 선택은 바로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게임 속 모든 직업과 특성에 장단점과 가치가 있듯이 우리가 타고난 성질도 스스로 강화하고 타인과 조합하기 나름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