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네 와인바 사장 Nov 11. 2019

와인은 킵이 안되나요?

"와인은 킵(남은 술을 업소에 맡겨두는 것)이 안되나요?"


일단, 저희 가게는 여러가지의 이유로 인해 와인 킵을 안 받고 있습니다(물론 위스키 등의 증류주는 가능합니다). 굳이 제 가게를 언급한 이유는, 사실 이게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가게 영업방침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와인 킵을 안 받고 있지만, 어딘가의 가게는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실제로 제가 직장인이던 시절인 얼추 10년쯤 전에, 와인을 킵 해주는 가게를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전문 와인바는 아니었고, 그냥 회사 근처 흔한 위스키바였어요. 당시 직장상사가 엄청난 주당인지라, 저도 술집에 많이도 끌려 다녔었는데, 마시던 와인을 킵 해달라는 상사의 말에 알겠다며 와인병을 가져가는 것을 보며 좀 황당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 당연히 안된다고 할 줄 알았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자면, 위스키도 양주고 와인도 양주이니 손님이 킵 해달라고 하면 해준다...뭐 그런 것이었을까요? 물론 그 당시에도 유명한 전문 와인바들이 꽤 있었고, 그런 가게에서 킵을 요청하면 당연히 거절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 뒤로 시간이 꽤 흘렀고, 와인의 대중화도 많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전 여전히 한달에 한번 정도 와인을 킵 할 수 있냐는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10년전이나 지금이나 와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일까요? 정말 궁금하기는 합니다.

이런 네임텍도 팔고 있군요.


어쨌든, 저는 왜 와인 킵을 안 받고 있을까요?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와인은 시간 별로 맛이 변하는 성질의 술 입니다. 만약 제가 손님의 와인을 킵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손님은 이틀 뒤에 가게에 다시 왔고, 킵 했던 와인을 달라고 합니다. 킵 와인을 위한 저장공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상황이었던 저는, 상온에 보관되어 있던 와인을 가져다 주고, 손님은 그 와인을 마십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뭐야 이거. 내가 맡긴 와인이 아닌데? 이게 어떻게 그 와인이야? 바꿔친거 아니야? 사장 나와!”

이것이 제가 와인 킵을 안 받는 이유입니다. 손님이 가게를 떠났을 때와 다시 돌아왔을 때 와인의 상태가 달라져 있는 것을 제가 책임질 수는 없거든요. 그리고 손님이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2-3일 뒤에 마신다면 못 먹을 와인이 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와인을 킵 하는 것은 말그대로 그냥 “의미 없는 짓”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물론 이것 말고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기는 합니다. 먹다 남은 와인은 보관하기 애매하다거나(오픈 안한 와인병을 보관하는 것과, 오픈 해버린 와인병을 보관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가게가 작아서 보관할 공간이 부족하다거나, 가게에서 취급하는 와인이 (위스키 류에 비해서) 그렇게 비싼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관 비용을 고려하면 가게의 이윤 관점에서는 마이너스라거나 등등.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게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와인을 킵 해줄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죠. 그러니,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와인을 마시다가 남았을 경우, 선택은 둘 중에 하나 입니다. 남기고 나오거나, 가지고 나오거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