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와 90일 미국 자전거여행] Day45~47
Day45 아드리안 – 투컴캐리 52km
11월 1일
세 번째로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날이었다. 맞바람이 불어 온종일 속도가 10을 넘지 못했고, 고속도로라 그런지 테러 다음날이라 그런지 히치하이킹도 되지 않았다. 빠른 것이 싫다. 빠르고 큰 것이 싫다. 자전거 여행 다시는 안 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했던 오늘은 바로, 시카고와 엘이이를 잇는 루트 66의 딱 중간 지점, 시카고로부터 1139마일, 그리고 엘에이까지 1139마일(약 1800킬로미터)이 남은 지점이었다. 너무 힘든데 히치하이킹은 번번이 실패하지, 하는 수 없이 자전거 위에 올라 계속 페달을 밟았다. 힘들면 가끔씩 끌고 가기도 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지만, 역시나 저 멀리 보이는 '무언가'는 아무리 가도 절대 가까워지지 않았다. 계속 힘든 날들이 이어지다 보니 ‘무얼 찾으러 여기 와 있는 걸까? 무엇이 그렇게 견디기 힘들어서 여기까지 도망쳐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어느 날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었다. '쓸모없는 인간, 하찮은 인간.' 나보다 한심한 사람은 없을 거라며 자책했다. 나는 너무 나약해져 있었고 무력감에 시달렸다.
20대 초반에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겪은 뒤 인생의 허무함과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그런 생각은 삶을 끝내도 좋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럴 때마다 어차피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중요하지 않다면 남들이 뭐라 하든 하고 싶은 걸 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은 높은데 나를 덮치는 불안감에 벌벌 떨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들이 더 많았고 그럴수록 더 무기력해지고 자신감은 떨어지는 악순환이 거듭되었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의 주인공 일가는 새 삶을 꿈꾸며 루트 66을 따라 서쪽으로 향한다. 어쩌면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생각으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그 끝엔 과연 새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5마일 남았다는데.. 끝이 나지 않는 길. 드디어 뉴멕시코주에 입성했다. 어쨌든 결국엔 도착을 하게 되고, 배 터지게 저녁을 먹었고, 휴게소에서 만난 친절한 아주머니 차를 얻어 타고 투컴캐리까지 왔다. 주유소에 내려서 텐트를 쳐도 되겠냐 물어보니 러브에선 안된다 하고 플라잉제이에선 주차장에 쳐도 된다고 해서 주차장에 텐트를 쳤다. 이곳엔 하룻밤 머무는 캠핑카들도 제법 있고 밝게 불 켜진 편의점에 계속해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어서 나름 무섭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편의점 화장실을 사용한 뒤 옆 캠핑카에 계신 할아버지와 몇 마디 인사를 나누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텐트 입구도 막고 자전거도 보호할 겸 자전거를 텐트 끈에 묶어 연결해 두었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았는데 결국 다 지나고, 이렇게 침낭 속에 누워 있다.
Day46 투컴캐리 - 산타 로사 75km
슬리퍼 한 짝이 없어졌다. 아마 오다가 떨어졌겠지. 남은 한 짝도 버렸다. 슬리퍼가 없으면 불편하지만 그만큼 짐 무게가 줄어든다는 생각에 조금은 기쁘기도 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인형을 주었는데 어떤 상황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아름다웠던 길도 당시에는 그걸 모를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런 것 같다. 아름다움을 느낄 여유가 내게는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길도 그저 이 긴 레이스의 일부일 뿐으로, 여느 길과 같이 힘들기만 할 뿐이다. 인생을 살아갈 때도 그럴 때가 있다. 타인의 눈에, 혹은 먼 훗날 돌아봤을 때 너무 아름다웠던 길 위에서 힘들고 우울해하며 그 길이 아름답다는 걸 느끼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나중에 돌아보면 내가 지금 포키와 함께 서 있는 이곳이 바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순간일 텐데.
쿠에르보라는 마을을 지났다. 루트 66이 개통되고 1940년대에 인구의 정점을 찍었다가, i40가 마을을 가르며 들어서게 되면서 지금은 거의 유령 마을이 된 곳으로, 작은 교회 하나와 주유소 하나가 있었다. 점점 해가 짧아지고 있다. 아직 고속도로 한가운데, 언제 이 길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는데 해가 지고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차들은 내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멈추고 싶어도 쉽게 멈추지 못할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이대로 가다간 깜깜한 어둠 속에서 라이딩을 해야 될 게 뻔했다. 게다가 후미등 배터리도 없었다.
고속도로를 휙휙 지나가는 자동차들은 그를 둘러싼 고독의 벽을 한층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뿐이었다.
-분노의 포도, 존 스타인벡
가다가 다시 차를 잡으려고 돌아봤는데 보랏빛 하늘에 커다란 달이 걸려 있었다. 심란한 와중에 너무 예뻤다. 하지만 여전히 너무 막막하고 두려웠다. 다시 달리고 있는데 자동차 타이어 수리점 광고판이 눈에 들어와, 재빨리 번호를 외웠다. 575-272... 기댈 곳이 아무 데도 없었던 만큼, 그 어떤 정보라도 소중했던 것이다. 갈 때까지 가 보다가 결국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속도로 위에서 깜깜해지기 일보 직전이 되었고, 너무 두려웠던 나머지 그만 경찰에 전화를 걸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자전거 여행 중인데... 아직 고속도로 위인데 해가 져서요.... 여기로... 데리러 와주실 수 있나요?"
경찰은 이미 내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거기 마일 포스트 285 맞나요?"
"잠시만요."라고 말한 뒤 조금 더 앞으로 가서 기둥에 적힌 번호를 확인해 보니 285라고 적혀 있었다. "네, 맞아요!"
"기다려요. 데리러 갈 테니까. 2~30분 정도 걸릴 거예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내 부탁에 경찰은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낯선 대륙, 어둠이 깔린 고속도로 갓길에 자전거를 눕힌 뒤 포키를 끌어안고 바닥에 앉아 경찰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손이 시린데 포키 배를 잡고 있으니 따뜻했다. 땅거미가 진 고속도로 위로 둥근달이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경찰이 와서 차에 자전거와 짐을 실었다. 내가 텐트 칠 곳을 찾는다고 하자 경찰 아저씨가 자기가 지내는 캠핑카 앞에 텐트를 치면 된다며 거기에 내려주었다. 그곳은 산타 로사 공항 옆 공터로 파일럿들이 사용하는 휴게실 같은 건물도 있어서 싱크대와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경찰아저씨가 지낸다는 캠핑카는 깜깜했고 휴게실에도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고 온통 암흑인 곳에서 헤드라이트를 끼고 텐트를 친 뒤 건물 안에 들어가 치즈라면을 끓여 먹고, 부족해서 식빵에 딸기잼과 버터를 발라 핫초코와 함께 먹었다. 그런 다음 텐트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조금 추웠다.
Day47 산타 로사 – 산타페 약간의 라이딩과 히치하이킹
어제는 어두워서 몰랐는데 사방이 탁 트인 허허벌판 같은 곳이었다. 파일럿 휴게실에서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출발하려는데 평소에 그렇게도 나만 찾는 포키가 내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데도 따라오지 않았다. 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포키... 실내가 따뜻하고 좋았던 건지.. 가기 싫은 거니.. 왜 안 와...ㅠㅠ 마침, 오늘도 i40을 달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데다 포키도 가기 싫은 것 같고, 나도 가기 싫은 것 같아서(?) 오늘은 반드시 히치하이킹에 성공하고 말리라 다짐하며 길을 나섰다. 일단 필립스에 가서 서브웨이를 먹었다. 샤워실이 있다길래 얼마인지 물어보니 12.5달러. 이제쯤이면 씻을 때가 되었지만 가격을 듣고 조용히 물러섰다. 그런 다음 주유소에 있는 차들에게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물어보았다. "혹시 어느 방향으로 가시나요?"
첫 번째로 물어본 차는 여기 사시는 분들이었고 두 번째 차는 차가 꽉 차 있어서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정오가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는데 오늘은 반드시 히치하이킹을 하고야 말 것이기에(확신은 없고 오히려 할 수 있을까가 의심되는 상황이지만) 느긋하게 패밀리 달러에서 장을 봤다. 핫초코, 스니커즈, 초코칩쿠키를 가방에 넣고 다시 출발했다.
가다가 드디어 차를 잡았다! 그런데 아저씨가 처음엔 태워주겠다 하며 내렸는데 막상 내 자전거를 보니 짐이 너무 많아서 안 되겠다며 말했다. "다른 차도 많을 테니 다른 차를 타는 게 좋겠어요. 미안해요."
그런데 다른 차가 안 잡힌다. 아까 그 아저씨한테 그냥 사정할 걸 그랬나.. 얼마 만에 멈춰 세운 차인데. 일단은 다음 주유소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러나 마치 앞으로 갈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자전거 세워 둘 난간이 나타날 때마다 멈춰서 물을 마시고 쿠키를 먹으며 앉아서 쉬었다. 앉은 김에 손을 흔들어보았지만 차들은 여전히 쌩쌩 지나칠 뿐이었다. 모자를 쓰고 일어나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역시나 실패해서 포기하고 뒤돌아 자전거를 끌고 언덕을 오르려는데, 맙소사 앞에 차가 한 대 멈춰 있었다. 차에 어떤 사람이 타고 있을지 모르지만 차 세우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만큼 일단 세워주기만 하면 누가 타 있든 목적지가 어디든 일단 타게 되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차에 올라탄 뒤 내가 물었다.
"콜로라도요."
"아, 저는 산타페로 가는 중이에요."
"저도 산타페를 지나서 가요."
"아 정말요? 그럼 산타페에서 내려주실 수 있나요?"
그리하여 원하던 금요일에 산타페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아저씨는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데어리 퀸에서 아이스크림도 사 주셨다. 차를 타고 가는 길, 특히 클라인스 코너스에서 산타페까지 가는 길이 너무 예뻤다. 이 길을 자전거가 아닌 차를 타고 지나는 게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다. 산타페에 내려 숙소를 잡았다. 2층이라 계단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며 짐과 자전거를 옮겼다. 마트랑 서브웨이까지 엄청 가깝고 방에 주방도 있었다. 여기에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트 가서 장을 보고 행복한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스티브가 준 파스타와 오이토마토에그 샐러드를 해서 저녁을 먹었다. 후식으로는 과카몰레와 토르티야 칩을 먹고 내일 갈 갤러리도 찾아 놓았다. 산타페는 뉴욕, 엘에이와 함께 미국 3대 미술 시장 안에 드는 도시로, 300개가 넘는 갤러리가 있고 인구 80% 이상이 예술 분야에 종사한다고 한다. 너무도 오고 싶었던 이곳에서 며칠 구경하며 쉬었다 가기로 했다. 포키도 고생 많았지. 푹 쉬었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