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기 Oct 18. 2023

우리 모두 언젠가는 흙이 될 텐데

[강아지와 90일 미국 자전거여행] Day42~44

Day42 그룸 – 애머릴로 76km


저스틴이 애머릴로에 사는 친구를 소개해주어서 오늘은 그의 집으로 간다. 미국에서 3번째로 긴 하이웨이 i-40를 달렸다. 나중에는 고속도로 달리는 게 끔찍이도 싫어졌는데, 옆에 루트 66이 나란히 있는데도 고속도로를 탔던 건 아마 루트 66이 노면이 울퉁불퉁 좋지 않았고 고속도로는 매끄러워 보여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리도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옆에는.. 차들이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쌩쌩 지나갔다. 그런 가운데 보이는 러브와 서브웨이 광고판은 언제 봐도 반갑다.

 저스틴이 소개해준 집에는 저스틴의 친구와 그의 여자친구가 같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거실 소파를 쓰게 해 주었고, 짐을 푼 뒤 함께 쌀국수를 먹으러 갔다. 이때까지 나는 고수를 싫어해서 조금만 들어가도 못 먹었었는데, 이날은 조금 들어가 있었음에도 먹을만하게 느껴졌다. 점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늘어나고 있는 걸까?

 사실 이날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저스틴의 친구와 그의 여자친구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은 닭을 키우고 있었는데, 다른 닭이었던지 혹은 개였던지 아니면 아예 다른 동물이 그들의 닭을 공격해서, 다친 닭을 집 안으로 데려와 치료해 주던 장면이 기억난다. 아니, 어쩌면 닭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쓰지 않은 일기와 기억에 담지 못한 풍경.  스치는 순간과 풍경들을 기억하고 싶어 기록하고 사진을 찍지만, 기록으로도 사진으로도 남기지 못하거나 힘들어서 땅만 보다가 놓쳐버린 풍경들도 분명 많다. 아쉽긴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서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나만의 색깔을 만들어주는 재료가 되어줄 거라고, 그로 인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되어 가고 있다고. 믿는다.



Day43 에머릴로 – 베가 60km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국 남자 배우가 자동차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가슴 아픈 사망 소식이 있었다. 아침은 뭘 먹지 따위의 사소한 걱정을 하고 있는 동안 누군가는 생사를 달리했다.   텍사스를 지나는 루트 66 위에는 캐딜락 랜치라는 명소가 있다. 미국 자동차 산업 황금시대에 미국인들의 꿈의 자동차였던 캐딜락 열 대가 미국의 거대함을 실감할 수 있는 지평선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1949년부터 1963년 사이에 생산된 각기 다른 모델인 이 차들에는 전 세계 방문객들이 뿌린 스프레이 페인트가 그 세월만큼이나 겹겹이 쌓여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포키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로지 냄새 맡기. 

 다시 출발해서 가다가 바퀴에서 소리가 나서 잠시 멈춰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도움이 필요하냐면서 차를 세웠다. 그러면서 내게 "커피 마시러 갈래요? 호텔로요."라고 하길래 단호하게 싫다고 했더니 그 역시 쿨하게 자리를 떠났다. 

나에겐 서브웨이가 최고. 다 먹고도 너무 추워서 밖으로 나가기가 싫었다. 할 수 있다면 여기서 자고 싶다. 

 오늘 길은 좋은 편이었다. 소방서가 닫혀 있어서 시청에 텐트 칠만한 곳을 물어보니 시티파크에서는 캠핑할 수 없다며 캠핑장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까지 엄청 춥고 그다음 날부터 날씨가 조금 풀린다니까, 오늘은 모텔에서 자기로 했다. 오늘도 마트에서 파는 일본라면에 토마토와 치즈를 넣어 먹었다. 그나저나 산타페에 빨리 가고 싶다. 아비키우도 꼭 가야지. 조지아 오키프처럼 뉴멕시코의 황량한 풍경 속에 깊이 머물고, 느껴보고 싶다. 


너무 약해지고 나태해졌다. 여행이 아직 반 이상 남았으니, 내일부터 다시 힘내보자.



Day44 베가 – 아드리안 23km


장갑을 껴도 손이 시리고 아무리 달려도 더워지지 않는 그런 날씨였다. 추위를 피할 곳은커녕 바람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을만한 나무나 바위, 풀 한 포기조차 없었다. 황량한 대지만이 계속 이어질 뿐. 저 멀리 보이는 곡물창고는 아무리 앞으로 가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지도를 보니 20킬로미터 남짓 가면 카페가 있어. 가서 핫초코 마시면서 몸 좀 녹이자.'

 바람에 중심을 잃고 지그재그로 달리고 이따금 고꾸라질까 봐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겨우 도착한, 황량한 대지에서 유일한 희망이었던 카페는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카페 옆 기념품 가게 아주머니가 오늘 너무 춥고 바람이 심하니 라이딩하기 무리라며 근처 캠핑장을 알려주었다. 일단 주유소 편의점에서 핫도그 세트를 사 먹고, 아무래도 더 가는 건 무리 같아서 2시도 안 돼서 캠핑장으로 갔다. "화장실과 샤워실 건물에 강아지 데리고 들어가면 안 되고 만일 강아지가 짖어서 민원이 들어오면 나가셔야 합니다." 캠핑장 주인아저씨가 마치 텍사스 바람처럼 냉정하게 이야기했다. 바람이 너무 세서 텐트 치기도 어려운데 잠시 옆에 묶어둔 포키는 풀어달라고 계속 짖었다. 브래지어 끈이 흘러내리는 것부터 해서 이렇게 이른 시간에 라이딩을 끝내다니 자꾸만 약해지는 내 모습까지. 이래저래 짜증이 났다. 침착하자. 안전하게 잘 곳이 있고 따뜻하게 샤워할 곳도 있다. 여기 화장실은 참 마음에 든다. 시간도 여유롭고 와이파이도 잘 된다. 짐들을 텐트 안에 던져 넣고 '기왕 이렇게 된 일이니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자'라고 생각하며 바람에 쉴 새 없이 흔들리는 텐트 안에서 낮잠을 잤다.

 그렇게 그칠 줄 모르는 바람과 추위를 피해 내내 텐트 안에 웅크리고 숨어 있다가 화장실을 가려고 텐트 문을 열었는데, 우와, 종일 꽁꽁 얼어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래 잘했어. 짜증 날 게 뭐 있어. 오늘도 포키와 나 모두 무사하고 이렇게 멋진 노을을 볼 수 있었으니 그거면 됐지. 


그러고 있는 사이, 뉴욕 맨해튼에서는 픽업트럭이 자전거 도로로 돌진하여 사이클 행렬을 들이받아 8명이 목숨을 잃었다. 밤새 텐트가 흔들렸다. 



이전 15화 강아지와 90일 미국 자전거여행, 첫 펑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