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제모름 Feb 24. 2019

에비게일 마샴을 위한 변명

 <더 페이버릿>(2018)


-영화: <더 페이버릿(The Favorite)>(2018,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Feat.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송곳니>(2009), <더 랍스터>(2015), <킬링 디어>(2017) 


* <더 페이버릿>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 페이버릿>(2018) 포스터.


너무 집중해서 본 탓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니 손이 저렸다. 내가 본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작품 중 가장 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는 굉장히 깔끔하게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고, 그 방식은 내 취향이기도 한데, 항상 ‘블랙코미디’의 ‘블랙’이 너무 지독해서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었으나 이번 작품은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다.
 
아주 퍼펙트한 필름이라서 덧붙일 말이 별로 없다. 깔끔하게 자극적인 화면 속 적나라하고 재치 있는 대사와 날카롭게 상징적인 행동들을 적절히 담는 아름다운 세 배우의 연기. 유럽 역사와 영화 연출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 자세하고 똑똑한 감상을 써 줄 테니, 이 글은 마음껏 개인적으로 써 볼까 한다. <더 페이버릿>의 챕터 나누기 형식과 대사를 빌려서.


<더 페이버릿>(2018) 스틸컷.



. “Favor changes.”
 
배경은 중세 영국, 주요 등장인물은 왕족과 귀족이다. 야당과 여당은 매일같이 싸우고, 앤 여왕이 매일같이 들여다보는 서류는 그녀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녀가 누구에게 호의를 보이느냐에 따라 토지세를 두 배로 올릴 것인지가 결정되며, 사적인 말 한마디나 편지 한 장에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실재했던 인물 사라 맬버러, 에비게일 마샴, 앤 여왕은, 작가와 감독의 뛰어난 상상력과 배우들의 재치 넘치는 해석을 통해 아예 새롭고 독창적인 캐릭터로 탄생했다. ‘허약체질과 지적 한계로 통치에 한계가 있었던 여왕’ 앤의 고통과 외로움을, ‘여왕의 총애를 받았던 최고 권력자 공작부인’ 사라의 카리스마와 사랑을, ‘로버트 할리의 측근’ 에비게일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영화는 담아낸다. 역사적 서술에 이야기와 감정이 붙는 순간, 그들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 살아 숨 쉬는 허구’가 된다.


<더 페이버릿>(2018) 스틸컷.


목적은 있었지만, 사라가 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차갑게만 보이는 사라는 앤도, 남편 맬버러 공작도, 잉글랜드도 모두 사랑한다. 솔직함이 그녀가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 사이에 에비게일이 끼어든다. ‘에비게일을 내쫓으라’고 솔직하게 말했던 사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연기하는 에비게일에게 이길 수 없었다. 왜 그녀들이 공생할 수 없었는가, ‘더 페이버릿’은 오직 하나이기 때문이다. 앤이 자신의 페이버릿이 사라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고, 결국 앤은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었던 사라를 버리고, 후회하며, 남은 것이지만 남은 것이 아닌 에비게일을 버리지도 사랑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더 페이버릿>(2018) 스틸컷.



. “I'm on my side.”
 
그렇다면 여기서 ‘악역’은 에비게일인가? 그렇지 않다. 모두가 주인공인 동시에 악역이다. 마치 ‘지옥에서 온 악녀’처럼 야비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에비게일에게 그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보려 한다.


<더 페이버릿>(2018) 스틸컷.


에비게일은 여러 사람에게 호의를 보이며 친절하게 대하지만, 그건 살아남기 위한 연기다. 그녀의 사랑이 향하는 곳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나르시스트라는 뜻은 아니다. “I'm on my side. 나는 내 편이에요.”라는 다소 직설적인 대사로 표현되는 그 사랑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애초에 귀족이 아니었거나, 계속 귀족 레이디로 살아왔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귀족이었다가 팔려가 비참한 생활을 해 왔으니, 다시 되찾고 싶었을 것이다, 삶을. ‘처음에는 그저 혼자 방을 쓸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했지만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었다’ 라기보다는, 불안한 하루하루가 아니라 완전히 발을 딛을 곳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해야 맞겠다. 그리하여 남자들을 거리낌 없이 이용했고, 자신을 받아준 사라를 잔인하게 내쫓았다. 왜냐하면 사라의 호의는 할리의 말처럼 언제든 변할 수 있었고, 실제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페이버릿>(2018) 스틸컷.


그녀는 남성을 혐오하며, 어떻게 요리하는지 잘 알고 있다. 마샴을 가지고 놀다 결혼 후에는 대놓고 무시하며, 자꾸 괴롭히고 이용하려 드는 할리를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든다. 그녀의 혐오와 기술은 우연히 타고난 것이 아니다. 자신을 산 남자에게 한 달에 28일을 생리한다고 거짓말했다는 웃음 섞인 말이 왜 그리 아프던지. 그 순간 그 ‘에피소드’는 여왕을 웃게 만들려는 재료로 사용되었지만, 건조한 음절 사이에서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보였다. 속이는 데에 성공했다고 해서 그 28일이 괴롭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며, 나머지 이틀 동안 그녀의 몸은 짓밟혔을 것이다. 마차에서 자신을 보며 대놓고 마스터베이션하는 남자 따위의 인간들에 둘러싸여 양잿물에 손을 데이고 흙에 파묻히며 강간과 강간 사이에서 에비게일은 살아남아야 했을 것이다.


예쁘게 화장한 마샴이 방으로 들어오자 에비게일은 ‘나랑 자러 온 거냐 아니면 강간하러 온 거냐’고 묻는다. 마샴이 ‘난 신사야’라고 하자, ‘그럼 강간하러 온 거네’라며 침대에 누워 몸에 힘을 뺀다. 물론 마샴은 그 순간 강간하지 않았고 그 뒤로도 하지 않았으나 어쩌면 그 시대에 마샴 같은 행동이 오히려 드문 쪽에 속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더 페이버릿>(2018) 스틸컷.


마샴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에비게일이 마샴을 가지고 노는 장면들은 작품에서 가장 ‘순수하게’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다. 마샴의 애를 태우려고 복도를 걸어 다니다가, 뒤돌아서는 대놓고 혐오의 표정을 짓는다. ‘당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다’면서 얼굴을 뭉개 화장을 지우고는 키스하는 척 하다 입을 깨물어버린다. 당황한 척 뺨을 때리고, 발로 차고, 밀쳐낸다. 결혼한 당일 잠자리에서조차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마샴이 ‘첫날밤인데!’라며 불평하자 그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손을 돌려 페니스만 만져준다. 이때 카메라의 초점은 손을 대강 움직이면서 생각하는 데에 집중하는 에비게일의 얼굴에 맞춰져 있다. 마샴의 얼굴은 흐릿한 배경으로 보이는데, 혼자 절정에 달하는 표정이 우습다. 여왕의 옆자리를 차지한 ‘마샴 부인’은 파티에서 취한 채 다른 남자 무릎에 앉아 남편에게 미소를 보낸다. 마샴은 스토리에 영향을 줄 만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 에비게일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그것으로 그의 역할은 끝이다. 이 장면들이 재미있는 까닭은 초기 권력관계에서 마샴이 에비게일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사랑하는 여자에만 집중해도 유지할 수 있는 권력을, 에비게일은 머리와 몸을 쉴 새 없이 굴리며 쟁취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용당하고 버려져도 마샴에겐 원래 있던 것이 남아있는데, 에비게일은 발 한 번 삐끗하면 어렵게 얻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더 페이버릿>(2018) 스틸컷.



. And...?
 
그렇다. 표면적으로 여성들의 권력싸움인 듯 보이는 이 이야기 속에는 사실 남성의 가부장적 권력이 숨어 있다. 성별보다는 신분의 격차가 더 큰 시대였다고는 해도, 그들이 아무 노력 없이 갖고 있는 권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송곳니>(2009), <더 랍스터>(2015), <킬링 디어>(2017) 등의 전작에서 감독은 디스토피아적 공간을 설정해 권력과 가부장적 남성성을 비틀고 비웃었다. 고상한 척 하면서 사실은 초라한 것을, 반면 <더 페이버릿>에서 세 사람의 권력과 사랑싸움을, 감독은 비웃지만은 않는다. 질투와 이기심으로 잉글랜드의 국민들을 쥐락펴락하는 이들을 무조건 권력에 눈먼 지배계층으로 몰수만은 없는 까닭은, 이들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실권을 모두 쥐고 있지만 사라에게 부여된 이름은 남편의 지위와 재산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맬버러 공작 ‘부인’ 이다. 에비게일이 자신의 발판을 다진 결정적인 수단은 남성 귀족과의 ‘결혼’ 이다.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이 있는 권력을 가진 앤 여왕은, 남성들이 우글우글한 궁전 안에서 통풍과 우울, 그리고 ‘어머니’가 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감독은 이들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표현해 오히려 관객이 연민 할 수 있게 만든다.


<더 페이버릿>(2018) 스틸컷.


섹스신도 마찬가지다. 감독의 전작들에서 이성애 섹스신은 남근신화를 드러내거나 비웃는 데에 쓰였다. <송곳니>와 <더 랍스터>에서의 생식기 외 아무 접촉 없는 섹스나 <킬링 디어>의 ‘전신마취’와, <더 페이버릿>의 섹스신("Rub my legs.")은 성격 자체가 다르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표정의 종류도 다르다. 연극적이고 때로는 무표정이기도 해서 일종의 ‘노동’을 하는 듯 보이기도 했던 전자에 비해, 배우들은 사랑과 기분을 실감나게 드러내는 표정과 대사를 보여준다. <더 페이버릿>의 섹스는 살아있으며, 욕망 그 자체를 드러낸다.
 

<더 페이버릿>(2018) 스틸컷.

 
이러한 맥락으로 <더 페이버릿>은, 의도적으로 남성을 여성의 발밑에 둔다. 에비게일은 마샴에게 ‘내가 생각할 때는 말하지 말라’며 핀잔을 주고, 앤은 ‘여자가 말하는데 어디 남자가 끼어드냐’고 소리치며, 사라는 ‘부인’이지만 말할 것도 없이 모든 당 의원들의 맨 위에 군림한다. 할리는 에비게일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는 마샴에게 ‘남자는 예쁘게 보여야 돼’라고 말한다. 이러한 여성 중심의 이야기는 남자 배우들에게 다른 방식의 연기와 매력을 보여 줄 기회가 되기도 한다. 권력 주위에서 올챙이처럼 헤엄치는 연기를 하는 남자 배우들에게서 새로움이 느껴졌다. 새침한 할리는 내가 본 니콜라스 홀트 중 가장 매력적이었고, 에비게일에게 놀아나는 마샴을 연기하는 조 알윈은 멍청해서 귀여웠다.


<더 페이버릿>(2018) 스틸컷.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면 그게 끝이다. 내가 영화에 대해 쓰는 글들은 평론이 아니고 단순한 감상이다. 평가를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요새 작품을 평가하고 상을 주는 것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기도 해서 그러한 투가 묻어나는 글을 더더욱 지양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더 페이버릿>은 완벽한 영화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올리비아 콜먼, 레이첼 와이즈, 엠마 스톤이여 영원하라. (앗 그리고 각본을 쓴 데보라 데이비스, 토니 맥나마라도.)


<더 페이버릿>(2018) 스틸컷.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